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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관람기] : ‘원로’들의 마당극,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
[공연관람기] : ‘원로’들의 마당극,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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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지난 2월 22일, 서울의 세실극장과 국립극장에서는 1시간의 차이를 두고 성격도 의미도 전혀 다른 두 공연이 막을 올렸다. 한 편은 소극장에서 무대 준비과정과 아마추어 출연자들의 분장 모습이 관객들에게 ‘들통’나면서 시작했으니, 새삼스레 막을 올리고 자실 것도 없는 마당극. 한 편은 전문성악인들과 음악인 수십 여명이 정식 대본과 음악으로 올린 오페라의 기자 시연회였으니 두 공연을 한 자리에서 함께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공연은 어딘지 모르게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풍자와 비판의 화살 끝은 어디로

마당극 ‘붉은 뺨을 찾습니다’는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 회원들이 창립 1주년을 자축하며 벌인, 집안식구의 놀이마당이다.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 손봉호 서울대 교수(윤리학), 이명현 서울대 교수(철학) 등 교수들이 주축이 돼 전직 장관, 검사, 의사 등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 3백여 명이 모인 까닭은 ‘도덕성 회복’에 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사회, 후안무치한 사회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義人을 찾아 헤매는 부름꾼의 여정을 따라 관객은 많은 군상과 맞닥뜨린다. ‘붉은 뺨’은 바로 의인의 징표. 부패정치꾼 권모술, 졸부 조졸부, 입만 살아 나불대는 지식인 임만살 등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 출연자들은 서슴없이 ‘망가지지만’ 어설프기 때문에 더욱 웃음을 던져준다.
회원들 면면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하는 것은 소극장 통로까지 들어찬 관객과, 그 틈에 자리한 방송국 카메라들. 일개 단체의 회원들끼리 벌이는 잔치에 보이는 관심치고는 언론의 대접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메시지 전달보다 출연자 개개인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해 방송이 헌신했다는 것은, 공연 시작 직전 아수라 상태에서 인터뷰에 여념 없던 출연자들의 모습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한 시간 동안 출연자와 관객은 함께 잘 놀았는데, 놀고 나서 생각해보니 정치꾼, 조폭, 로비스트로 분한 원로들의 ‘망가진’ 연기에서 관객들이 받았던 카타르시스의 정체가 묘연해진다. 바보 연기를 하는 배우의 눈빛이 형형하고, 병신춤을 추는 광대의 관절이 멀쩡해 보였다면,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다. 아마추어 배우들의 연기를 평가할 까닭은 없으나, 판을 이토록 크게 벌인 목적이 자못 궁금하다. 계몽, 혹은 원로들의 충고? 과연 원로들이 우스꽝스런 분장과, 가죽점퍼 속에 감춘 비판의 화살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고급 풍자의 칼끝은 결국 자기자신에게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 되뇌어지는 순간이었다.

정서의 답보, 혹은 퇴보에서 오는 진부함

마당극이 너무 넘쳐서 탈이었다면, 민족음악인협회가 주최한 오페라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공연은 너무 아껴서 문제였다.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단촐한 무대, 표정 굳은 정적인 사람들, 목석같은 연기, 극적 재미없는 밋밋함이 그렇다.
시종일관 근엄함을 잃지 않는 김구에게서는 인간적인 고뇌와 섬세한 감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영웅이자 의인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모두가 아는 인물을 새로 만들어내는 일의 어려움을 생각한다면 애당초 김구라는 소재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보편적인 감상과 일방적인 칭송에서 벗어나지 못할 바에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고민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칸타타의 생명이 음악에 있다면, 그 역시 못 미쳤다. 배우들의 목소리는 객석 뒤쪽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고, 국립극장의 큰 무대를 채우기에 성량 또한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극을 진부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무대나 연기와 같은 외형적 부분이 아니라, 도식적인 정서의 남발과 감동의 강요에 있었다. 1장 ‘아들이여 나의 아들이여’에 등장하는 ‘백성의 어머니들’은 시종일관 부드럽고 강인하며, ‘생명의 물’, ‘든든한 성벽’이어야 하고, 아들은 의롭고 지조 있는 삶을 산다는 설정은 극의 끝까지 이어진다. 민족/일제, 선/악의 순진한 이분법은 오랜만이어서 차라리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
민족음악인협회는 통일 이후의 사상적 지표로 김구를 설정해놓고 있다. 1999년부터 백범에 관한 공연을 이어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시대의 공백을 꼭 사상으로 메워야 하는가에 대한 꼭 그리고 메워야 한다면 그것이 굳이 폐기의 논리, 혹은 극복의 논리로 읽히고 있는 ‘민족주의’여야 하나 하는 물음이다. 그 물음이 빠져 있다면, 당위와 신념만으로 불러오는 민족주의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위험하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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