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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논문 형식에 집착말고 다양하게 빈곤을 드러내자”
“학술논문 형식에 집착말고 다양하게 빈곤을 드러내자”
  • 조순경 이화여대·여성학과
  • 승인 2009.04.20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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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_ 「관계의 결핍으로서의 빈곤과 학문으로서의 나눔」

그동안 연구자들이 가졌던 환상 가운데 하나는 국가 혹은 시장이 노동여성 빈곤의 문제를 일정 정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20년간의 경험을 통해 볼 때 국가와 시장은 일하는 여성들의 빈곤을 해결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재와 같은 금융 위기 상황에서 국가나 시장의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현재의 경제사회적 조건에서 큰 변화가 없는 한 실업과 시장 경제 영역에서의 고용불안정이나 그로 인한 빈곤을 해결할 별다른 방안이 마련되기 어렵다. 고용 불안정, 노동 빈곤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새로운 노동 공동체, 지역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시민들 스스로 나눔과 돌봄을 통해 해결하는 방안이 가장 현실적일 수 있다. 시장 영역 밖에서의 일자리의 창출, 그리고 공동체적 나눔을 통해 자원의 결핍과 사회적 배제를 해소해 나가는 방안에 대한 연구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빈곤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관심과 보살핌이 있는 관계가 있는 상황에서 빈곤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의 부재가 빈곤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면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공동체적 관계의 부활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공동체적 관계 형성의 첫 번째 단계는 빈곤한 현실과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빈곤은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요 미디어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와 이미지가 사라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빈곤한 이미지의 제거는 마치 지구상에서 빈곤이 사라져 가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관계의 결핍으로서의 빈곤 개념을 수용한다면, 그리고 공동체적 나눔과 돌아봄을 통해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나눔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은 무엇인지, 그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은 무엇인지, 정규직은 왜 비정규직의 삶에 무심한지, 왜 그들과 나누려하지 않는지, 빈곤 해결, 차별 해소를 위한 방법으로서의 관계 형성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의 문제는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대학과 학계, 학자들은 이 시점에서 스스로에 대해, 스스로의 노동에 대해 탐구하고 분석 할 필요가 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무한 경쟁을 전제로 한 세계화는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 자신의 삶에 몰두하도록 만들고 있다. 교수와 예비 교수들에게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글보다는 ‘전문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있다. 소장 신임 교수들 은 영어 강의를 필수적으로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학자들이 자신 이외 타인의 삶에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어렵다.

빈곤은 국가 정책이나 시장경제의 영역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나눔을 통해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나눔에 앞서 필요한 것을 그러한 나눔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빈곤한 사람들의 모습이 사회에서 사라지고 은폐되고 있는 상황에서 빈곤 극복을 위한 일차적인 과제는 이러한 빈곤하고 차별받는 현실에 대해 ‘아는 것’이다. 그 과제를 해야 할 일차적인 장은 학교, 대학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대학 교육과정에서 이러한 앎을 위한 교육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나눔이 학문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대학은 나눔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학문의 영역에서 이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기에 학교 교육과정(커리큘럼)에도 이에 대한 내용은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

세계화로 인한 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자원의 나눔의 필요성에 대한 주 장도 있고, 호혜와 선물에 기초한 경제에 대한 논의도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 배제로서의 빈곤 해결을 위해서는 단순히 거시적인 차원의 자원 분배와 이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구상의 빈곤은, 그리고 한국 사회의 일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빈곤은 지식의 부재로 인한 것이 아니다. 현재 경험하고 있는 금융위기는 인간의 지식이 모라라서 야기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알려주고 말해도 직접 겪기 전까지는 못 알아듣는 인간 인식 능력의 한계가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인간의 욕망 구조,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 때문일 것이다. 교육자로서, 그리고 연구자로서 대학에 있는 나 자신의 이해와 관심, 내가 있는 자리,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거리두기를 하고 냉정하게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순경 이화여대·여성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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