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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교통 통제, 그 음울한 질서의 음모를 넘어
[문화비평] : 교통 통제, 그 음울한 질서의 음모를 넘어
  • 김진호 목사
  • 승인 2002.03.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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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05 00:00:00

김진호/당대비평 편집위원·목사

택시 타고 시내를 관통하던 때였다. 시청 앞 도로엔 유난히 경찰이 많다. 웬일인가 했는데, 머리가 반백인 베테랑 기사 왈, 어쩌면 곧 교통 통제가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그의 추측대로라면 ‘귀빈’이 지나갈 모양이다. 다행히 통제 직전에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된 게 행운이었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길가에서 국기 흔들던 때가 떠올랐다. 수업 빼먹는 재미에 볼거리 듬뿍한 카퍼레이드까지, 그 ‘끝내주던’ 구경거리가 그땐 참 많았다. 대학 시절, 교통정리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는 좀 다른 기억이다. 아침마다 공덕동 로터리를 신호 한번 안 걸리고 통과하는 차들이 이토록 많은 줄은 그때서야 알았다. 방향이 다른 길을 가려는 차들은 그 긴 시간을 오랫동안 잘도 참았다. 택시 기사 말에 의하면 바로 그 무렵, 아직 공항에 도착하지도 않았던 대통령을 위해서, 시청 앞 도로가 통제됐단다.

기억나는 대로 열거하자면 아직도 한참을 더 말할 거리가 남았다. 이렇게 교통 통제란 우리에겐 꽤나 낯익은 문화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요즘은 옛날처럼 귀빈이 카퍼레이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다행이다. 하지만 ‘귀한 분들’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신호대기 해야하는 일은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아마도 그들의 업무가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이런 관행이 생겨났을 게다. 그 중요한 업무가 길에서 낭비돼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교통 통제의 논거일 것이다.

물론 이런 논거에 동의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권력을 쥔 이에 대한 순응이 몸에 밴 탓에 저항하지 않을 뿐이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소극적으로 순응한다기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이런 관행을 받아들인다. 왜냐면, 우리 자신이 일상 속에서 이런 권력 양식의 하나인 교통 통제를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의 인생에서 장애물이 될성싶은 것은 뭐든지 제거하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식의 친구 관계에 관여하려 하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전망 좋은 것을 장래 계획으로 삼게 한다. 심지어 영어 잘 하는 아이를 만들려고 혀 수술까지 받게 한다. 시행착오 없는 인생을 살게 하려는 욕망인 게다. 남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서 살려면 더 효율적인 길을 가야하겠기에 인생의 ‘교통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비단 부모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가족을 포함해서 위계 질서가 잘 짜여진 집단일수록,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한다―자신이 그보다 그를 위해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 아래서. 결혼은 이런 교통 통제의 백미다. 서른이 다 된, 혹은 그 이상이 되도록, 그네들은 윗사람의 교통 통제를 받는다.

우리의 일상은 나면서부터 이렇게 만연한 교통 통제 문화 속에서 펼쳐진다. 자본주의 사회가 심화될수록, 사회의 경쟁성이 강화될수록, 시행착오 없는 효율적 삶이 더욱 강조된다. 어린 나이부터 소위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의 대열 속에 편입되어야 하며, 이것은 전근대적인 위계 질서를 온존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결국 교통 통제는 미시적 영역에서 거시적 영역까지 사회 전체 질서의 원리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장애물 없이 도로를 통과한 귀빈은, 아니 우리 자신은, 장애물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심성을 배우지 못한다. 단지 그들을 장애물로만 여길 뿐이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성공하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타인을 자신처럼 존중하는 자세를 습득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세상을 이기는 것만을 가리키는 교통 통제 문화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 관한 생각을 마비시킨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악마의 유혹이 아닐까.

여기서 나는 복음서의 ‘예수 유혹 이야기’를 떠올린다. 악마는 예수에게 영웅적인 능력을, 남보다 탁월한 권위를 통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 한다. 보다 빠르게 보다 손쉽게 세상을, 세상의 논리를 이겨보겠다는 욕망, 장애물 없이 대로를 달리는 왕의 마차에 올라타려는 욕망, 바로 이것이 악마가 예수에게 심어주려 했던 유혹의 요체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그 유혹, 뿌리치기 어려운 악마의 달콤한 유혹 앞에 직면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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