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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과학과 詩가 어우러진 진달래 먹던 시절
[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과학과 詩가 어우러진 진달래 먹던 시절
  • 교수신문
  • 승인 2009.04.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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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는 한라산에서 백두산 까지 전국 어디에나 피어나고 ‘참꽃’이라 부른다. 새 중의 새가 ‘참새’요, 나무 중의 나무가 ‘참나무’라면, 꽃 중의 꽃이 아리따운 ‘진달래’다. 어릴 때 이야기다.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에 너 나 할 것 없이 부랴사랴 야트막한 산등성이, 깎아지른 벼랑을 앞 다퉈 기어오른다. 궁둥이에 비파소리가 난다. 그때는 그 산이 몇 십 길이나 높더니만 나이 먹어 어른이 돼 보니 그렇게 낮은 것을…. 아련한 추억! 학교 건물도 커보였고 강물도 무척이나 깊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서둘러 진달래꽃을 한 옴큼씩 따서 양지바른 언덕아래 옹기종기 둘러앉아 허덕허덕 꽃잎을 따먹는다. 이른 봄 진달래꽃 피는 때가 바로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먹을 게 없는 어려운 보릿고개 철이다. 지지리도 먹을 게 없으니 아등바등 草根木皮로 연명한 麥嶺, 어쩌면 그 고개가 그리도 높았던가. 기꺼이 그 艱難을 무릅쓰고 굳게 견뎠다. 피할 수 없으면 맞서라!

초근의 대표가 잔디뿌리다. 그놈을 캐서 흙을 털고 어금니로 꾹꾹 씹으면 달착지근하다. 과당이 든 탓이다. 찔레 순을 꺾어 얇은 껍질을 벗겨 먹고, 무덤가에 길길이 자라는 띠(삐비)풀의 꽃 순을 뽑아서 먹는 것은 다반사다. 소나무 껍데기 같은 얼굴,        건 버섯이 그득 얼굴을 덮은 깡 촌놈들이다. 목피가 뭔가. 이른 봄에 소나무에 수액이 오르기 시작하면 뒷산에 올라가 소나무 껍질을 벗긴다. 작년(2년생)에 생긴 솔가지를 잘라 껍데기를 낫으로 벗기고 속껍질을 하모니카 불듯이 이빨로 생채기를 내면서 죽죽 빤다. 다디단 물이 푹푹 튕긴다. 묵은해에 생긴 나무 가지 속껍질을 낫으로 쓱쓱 벗기니 그것이 松肌다. 쪄서 말려, 콩콩 찧어 밥에 놓아먹기도 하고 가루를 떡에도 넣는다. 송기의 송진, 타닌 때문에 입안이 떫디떫기 그지없으나 마냥 퍼 넣는다. 입도 고프지만 배도 고프다. 이런 것들이 죄다 배 주림을 면케 한 救荒食品이다.

참꽃의 얇은 이파리가 혀끝에 감치는 맛이 일품이다. 풋풋한 풀냄새가 나지만 胃가 더 먹으라고 재촉을 한다. 주섬주섬 진달래꽃잎을 뜯어먹을라치면 나중엔 입가가 푸르죽죽해진 진다. 옅은 보라색이다. 어이없다. 제 입에 꽃물 묻은 줄은 모르고 남의 입만 그런 줄 알고 하! 하! 하! 배꼽을 쥐고 웃어 제친다.

꽃잎에 든 花靑素(안토시아닌)라는 물질이 약 알칼리성인 침(타액)과 반응해 푸르죽죽해진 것이다. 보라색 립스틱을 한 조무래기들! 진달래 꽃잎은 시큼한 맛(산성)이 나는 붉은 색이 아니던가!  화청소는 산성에 붉고 알칼리성에는 푸른색을 띤다. 리트머스(litmus)에는 ‘리트머스이끼’에서 뽑은 화청소가 들어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산성식물의 꽃은 붉고 알칼리성식물의 꽃은 푸르다.

그리고 진달래 꽃잎은 끝이 다섯 갈래로 짜개져 있고, 그 가운데에는 기다랗게 암술 하나가 솟아나 있으며, 그 둘레 10개의 수술이 모여나 있다. 암술이 수술위로 쑥 길게 솟아난 것은 제꽃가루받이(自家受粉)를 하지 않겠다는 심보다. 실제로 식물은 제 꽃가루와는 정받이(受精)을 하지 않으니 이를 自家不和合性이라 한다. 당신들이 참으로 英明하기 짝이 없구나. 인간은 늦게야 이들에서 近親結婚이 해롭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라도 허기를 면하고 나면 금세 놀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는다. 어린이는 놀지 않고는 못 배긴다. 강아지가 그렇고 사자 새끼도 짓궂게 놀면서 자란다. 혼자 키운 강아지보다 여럿 모아 키운 강아지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란다. 드디어 진달래꽃 꽃술에 눈이 간다. 못 먹어 눈은 떼꾼하지만 눈빛 하나는 형형하다!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다. 동시다발이란 말이 맞다. 이제 놀이시작이다. 가운데 솟아있는 굵은 암술을 조심스럽게 따서 거기에 침을 바른다. 수술은 암술보다 가늘고 여려서 암술을 주로 쓴다. 짝끼리 ‘꽃술싸움’ 시작이다! 이것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다. 서로 짧게 잡겠다고 샅바싸움을 오래한다. 가능한 암꽃술 대를 짧게 잡아야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서로 X자로 술을 싸잡아 걸고 끌어당겨서 잘려지는 쪽이 지는 것이다. 이긴 사람은 희희낙락, 손가락 끝에 호호 입김으로 힘 올려서 동무 이마에 야무지게 딱! 꿀밤을 먹인다. 이렇게 우리 때는 주변의 모든 것이 놀이감이었다. 설레는 놀이 그 자체가 과학이다.

천연스런 어린이가 쏟아낸 말이 바로 시다. 어린이는 詩人이요 科學者다. 과학과 시는 이렇게 만난다.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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