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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반성
조그만 반성
  • 교수신문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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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사람은 눈 앞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하는, 초라한 존재다.”-간디. 하물며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존하는 고향의 지도란 얼마나 불완전하겠는가. 그러나 길을 떠나 세상을 돌아보고 이방인의 책을 읽으면서 쌓은 지식은 세상에 대해서도,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게 만들었다. 지식의 왕국에서 나는 기억도, 세상도 하나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의 누추한 유년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도.

낡은 사진에 새겨진 수많은 세월의 금처럼 골목은 얽혀 있지만, 조심스레 발을 내밀고 들어서면 모퉁이 모퉁이는 그대로 남아있다. 모두 모여 길을 막고 구슬치기랑 딱지치기를 했던 골목은 이제 보니 두 사람도 지나가기 힘들 정도다. 어느 막다른 골목 안에는 자물쇠가 채워진 변소가 여전히 비스듬하고, 토담집 같이 기울어진 집 두 채가 대문을 마주하고 있다. 때로는 검은 옷을 입은 얼굴 가린 사나이가 골목으로 들어와 도둑을 막지 못하는 허술한 대문 하나를 일부러 소리나게 열고, 가위눌려 곤두선 꿈속으로 찾아들곤 했다. 눈을 뜨니 놀이하던 꼬마들은 다 사라지고, 노인 한 사람이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 낯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곳곳에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의 높이가 바뀌고, 창문 많은 집들은 낮게 누운 집들을 내려다본다.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에는 낙서가 희미하고, 추억도 깃들 곳을 잃어버렸다. 마을을 가로질러 고개를 올라오던 넓은 신작로는 이미 옛길이 되어 버리고, 가파르던 언덕을 지키며 길 한쪽에 서 있던 아름드리 벚나무들도 사라졌다. 뭉게뭉게 흰 연기를 뿜어내며 소독차가 지나갈 때면, 꼬마들은 연기 속을 달리며 차를 좇았다. 어느 비 오던 여름날 새벽, 연탄 실은 트럭이 언덕을 굴러 떨어지고, 나무 한 그루가 뿌리째 뽑혔다. 동네 아이들은 연탄가루가 검게 묻은 채로 젖은 가마니 밑에 누워있던 주검을 여름이 다 가도록 이야기했다. 흰 눈이 많이 내렸던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마을 옆으로 새 길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유년의 마을을 쉽게 찾지 못했다. 그 사이 오래된 마을을 비켜 길들이 더 생겨났고, 새로 난 길들만이 서로 흐름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나의 지도 한 가운데에 놓여 있던 고향은 개발의 진로에서 벗어났고, 나의 기억은 환상만을 안고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려 서투른 발길로 마을의 입구를 찾아 헤맬 때, 오직 예기치 않았던 우연으로 마을이 깨어나 다가왔다. 신은 사람을 초라한 존재로 만들면서, 이러한 구원도 열어 두었나 보다.

나는 부서진 기억을 소중히 챙겨들고, 아직도 자만에 찬 지식들을 털어 내었다. 내 유년의 마을을 다녀온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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