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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 인간의 동물화를 논한다
포스트모던 시대, 인간의 동물화를 논한다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4.20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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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아즈마 히로키 도쿄공업대학 세계문명센터 특임교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 교수(38세)는 데리다에 관한 연구로 화려하게 일본 사상계에 등장을 한 뒤, 지속적으로 오타쿠 관련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문화 평론가다.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잇는, 혹은 그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아즈마 히로키의 저작은 프랑스, 미국, 한국 등에 번역이 될 정도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특히 그는 오타쿠가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인간형을 나타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기존의 포스트 모던론과는 또 다른 차이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향후 인간에게는 오타쿠처럼 동물화된 면모와 근대인간의 면모가 해리적으로 공존한다고 밝히면서 미래 문명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사고를 촉구하고 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 국내에 소개돼 있다. 아즈마 히로키의 섭외와 번역은 선정우 코믹팝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맡았다.

△초기 데리다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오타쿠 등 서브컬처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귀하의 궤적에는 다른 연구자들로부터 독특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점도 많은 듯 하다. 귀하가 연구자로서 생활하면서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지속적인 문제의식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반드시 그 하나 뿐만은 아닙니다만, ‘인간은 한 번의 인생밖에 살 수 없지만, 다른 인생도 상상할 수가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저의 데뷔 논문은 강제수용소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부조리를 다룬, 「확률의 감촉」이란 제목의 문예 평론이었습니다. 데리다에 관한 저작에서도 확률론이나 가능세계론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사실 오타쿠 관계의 저작에서조차도 ‘멀티 엔딩 노블(multi-ending novel)’을 주제로 다루곤 했습니다. 관심을 둔 대상이 상당히 이동하긴 했습니다만,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일관된 자세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철학 연구자로서도 성공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서브컬처에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나 동기는 무엇인가.

한 가지 이유는, 제가 원래부터 오타쿠였고 또 마침 1990년대 중반의 일본에서 『신세기 에반겔리온』의 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작품에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의 이유로는, 1990년대 말의 일본에서 현대사상이나 비평의 담론이 폐색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다루는 대상이나 문체의 대담한 변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귀하가 주로 영향을 받은 사상가나 사상의 흐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특히 프랑스 사상에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제 작업은 프랑스 현대사상만이 아니라, 전후 일본 문예비평의 전통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가라타니 코진(柄谷行人)의 연구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철학자라고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 이외에 제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상가’를 한 명 든다면,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등의 저서에서 귀하는, 근대적 유형의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과연 미래에 그 같은 ‘동물적이고 포스트모던적이며 오타쿠적인’ 인간형이 많아질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 타입의 인간은 컴퓨터나 인터넷, 만화 문화 등이 활성화돼 있고 같은 취미를 가진 집단의 활동이 활발한 환경, 즉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해, 귀하의 이론이 어떤 점에서 지구적인 규모의 보편성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한편으로 우선, 오타쿠 문화 그 자체가 지금 글로벌한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오타쿠들의 生은 이미 일본만의 특수한 사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제 책에서는 오타쿠들의 생은 어디까지나 포스트모던 사회, 혹은 현대사회의 한 사례로서 분석돼 있다는 것에 주의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타쿠들이 특수한 존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일견 특수해보이는 그 생활 방식이야말로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의 정비나 가상적 환경의 확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무효화나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의 발달은 일본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경향입니다. 그 경향 위에서, 일본에서는 마침 오타쿠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발달했다는 것 뿐이죠. 다른 나라에서는 오타쿠적이 아닌 표현의 형태를 띠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제시했던 ‘데이터베이스’나 ‘동물화’라는 개념 자체는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경제위기, 환경오염, 국지전, 민족 갈등, 빈부격차 등 현대의 현실은, 여전히 거시적인 해결책이나 거대 담론들, 그리고 강한 윤리적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아직도 인류에게는 사회적 해결책이나 정치적 전략, 윤리적 호소가 필요하다는 점에 귀하는 동의하는가. 만약 동의한다면 그것은 귀하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는 ‘인간의 포스트모던적 동물화 경향’과 대립되는 것은 아닐까. 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물론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주장과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제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주장했던 것은(이것은 일본에서도 자주 오해받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전면적인 동물화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부분과 동물적 부분의 해리(解離)적 공존’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인간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해서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복잡성의 감축’이 기능하지 못하게 된 후, 복잡함이 복잡함인 채로 나타나게 되는 세계에 있어서는 아무리 정치적이자 윤리적이려고 하더라도 모든 영역에 있어서 정치적이고 윤리적일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격차문제에 열심인 사람은 환경문제에 무관심할 수도 있고,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활동가가 내셔널리즘이나 젠더의 문제에는 놀랄 만큼 둔감할 수도 있습니다. 우익과 좌익, 보수와 리버럴이라는 ‘패키징’이 기능하지 못하게 돼, 싱글 이슈마다 여러 가지 입장이 모자이크 상태로 혼재하는 것이 21세기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즉 포스트모던의 인간은, 어떤 부분은 인간적이지만 다른 대부분에서는 동물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앞으로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사고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진지하고 공공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이슈에 관해서는 훌륭한 공공적 논의를 전개하는 바로 그 사람이 또 다른 이슈에 관해서는 단순한 소비자, 즉 ‘동물’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상황입니다. 근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종합적인 지식인은 아마도 존재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일각에서는 기계화, 정보화의 심화가 인간─기계의 공진화(co-evolution)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인간의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이 기계에 의존하면서 독자적인 기억력, 계산력, 사고력을 점차 상실하고, 나아가서는 기계와 동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귀하는 이러한 예측과 우려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있나.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라는 것을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자면, 그것은 최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 전체에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구글의 등장으로 인간은 점점 기억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문자가 탄생했던 순간으로부터 이야기돼오던 것으로써 실제로 소크라테스도 똑같은 지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반면 만약 질문에서 말하는 ‘기계와의 동화’가 문자로부터 인터넷에 이르는 미디어적 문제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기술 측면에서의 가능성, 예를 들어 맨-머신 인터페이스(man-machine interface)의 발전이나 그보다도 더 먼 곳에 환시(幻視)되고 있는 ‘싱귤래러티(Singularity)’(이것은 SF용어입니다만)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에 관해 논의하는 것은 아직 시기 상조일 것입니다.

△들뢰즈(Gilles Deleuze), 푸코(Michel Foucault), 데리다(Jacques Derrida)와 같은 사상가들이 서거했다. 21세기에는 귀하와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이 기대되고 있다. 21세기에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사상적 과제는 어떤 것이 있을지,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인들의 자세는 어떻게 돼야 할 것인지 의견을 듣고 싶다.

너무나도 질문이 거대해, 책임 있는 답이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이라면, 이데올로기가 없는 상태, 즉 ‘친구’와 ‘적’을 단순히 구별할 수 없게 된 세계에 있어서 언론인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고민해가는 것이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과제일 것 같습니다. 20세기의 언론과 정치는 기본적으로 친구와 적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데리다나 푸코의 작업들이 예외적으로 빛났던 것이죠.) 하지만 앞으로는 또 다른 발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귀하의 동향에 관심이 많은 한국의 연구자들과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제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매우 기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책이 한국의 지적 문맥에서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저 개인은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한국의 비평적, 사상적 정보가 아직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점은 인터넷 시대가 됐어도 놀랄 만큼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서로 많은 문화적, 사회적 상황을 공유하고 있고, 따라서 한국의 지적 상황에 대한 일본 측의 관심도 작지 않을 것입니다. 제 일은 현대사상과 팝 컬처를 잇는 것입니다만, 그로 인해 또 양국 간의 새로운 교류의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기쁘겠습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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