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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편수 그만 따지고 質 평가로 … 이제 창의적 연구해야 生存 ”
“논문 편수 그만 따지고 質 평가로 … 이제 창의적 연구해야 生存 ”
  • 김봉억 기자
  • 승인 2009.04.13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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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좌담-교수 그리고 대학의 미래

평소 융합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하며, 대중과의 소통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미래 대학의 모습을 구상해 온 학자들과 자리를 마련했다. 미래지향적인 ‘나침반’이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래’라는 화두의 힘일까. 거센 개혁 요구에 궁색한 ‘방어 논리’가 아니라 솔직하고 냉철한 현실 진단이 쏟아졌고, 개혁 대상이 아닌 개혁 주체가 됐다. 상업화도 반대만 하기보다 ‘공공성’을 키워 균형을 찾고, 대학 양극화 추세도 사회와의 활발한 연계 활동으로 ‘문제해결사’로 맞서야 한다. 대학 바깥의 현실 문제도 고뇌의 대상이다.
이번 좌담을 통해 교수사회와 대학이 변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연구와 교육에다 봉사 점수도 제대로 맞춰야 하고, 교수란 직업은 이런 고민들을 스스로 중재, 조절해야 하기에 상처도 많이 받지만 아픈 척해선 안 되는 영혼들이 아닐까요.” 버거운 짐을 진, 하지만  당당히 맞서는 교수들의 각오로 들린다.

●일시: 2009년 4월 6일 오후 4시 / 장소: 교수신문사 회의실
●사회: 최재목(편집기획위원, 영남대 철학)
●참석: 심광현(한예종 미학), 오세정(서울대 물리학), 임경순(포스텍 과학사) 교수
●정리·사진: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사회/최재목 영남대 교수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는데, 대학은 여전히 낡은 방식을 고수하고 있고 정부나 기업은 투자를 꺼립니다. 대학은 미래를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사회: 교수신문이 벌써 창간 17주년을 맞았습니다. 항상 환경은 변화해왔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유비쿼터스시대이고, 腦本사회라는 말도 나오고, 더욱이 나노(nano), 바이오(bio), 인포(info), 코그노(cogno), 그리고 디지그노(designo)가 상호 융합되는 등 이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길찾기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런 흐름들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고는 교수들도 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현재 교수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대학을 둘러싼 환경 변화에 주시하며 우리 대학들이 과연 어디로 나아가야할지의 고민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논의를 현재 우리의 교수상과 대학의 변화, 그리고 향후 10년을 위한 준비로 크게 나누어서 진행을 해볼까 합니다.

유비쿼터스시대, 교수의 위상 변화

오세정: 우리의 경우, 남을 따라가는 것은 어느 정도 된 거 같아요. 남이 안한 것을 해야 하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학회 나가봐도, 현재적 주제를 소화하고 있는 것 같고, 월드 클래스 수준의 대학까지는 다가간 것 같은데, 세계를 리드하는 수준, 탑 10까지는 도달한 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자연대학장 때, 외국 학자 불러 평가했을 때, 돈이 굉장히 든다, 실패도 많이 한다, 이걸 다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이 안한 거 하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이를 용인하는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말하더군요. 우리가 바로 이런 임계점에 도달한 것 아닌가 합니다.

임경순: 오늘날 교수상은 19세기 훔볼트의 대학 개념에서 시작한 게 아닌가 합니다. 새로운 진리 창출, 연구자로서의 교수 상이 확산된 것 같아요.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의 모델이 미국으로 들어가고, 그게 결국 한국에 이입된 거죠. 그러니까 200년 걸린 모델을 지금 우리가 따라잡아 왔던 거죠. 이제는 오 교수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정도 따라잡은 거 같은데, 해외추세를 보면, 그동안 너무 연구중심으로 하다보니 학생교육을 등한시하는 문제가 노출됐어요. 또 사회는 굉장히 빨리 변화하는데, 대학은 과거 시스템으로 나가려고 하죠. 여기서 교육, 연구 문제가 혼란이 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학생선택권 강화와 같은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죠.

사회: 연구란 것도 생각해보면 저서 중심이 아니라 논문! 논문! 하면서 모두 그쪽에 치중하고 있지요. 연구와 교육은 상보적인가요. 중요한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리드하는 건가요?

오세정: 그동안 너무 대학은 BK다 뭐다 해서 연구만 강조했어요. 실제로 대학 고유 의무는 학생 교육인데, 이에 대한 반성과, 이걸 제대로 해야 할 시점에 이른 거죠. 그런데 어떻게 이 두 가지를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을지….역할 분담이 필요합니다. 하버드대 로도브스키는 연구중심대학의 지적 연구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지적했죠. 선진국은 역할 분담하는 거 같아요. 젊어선 연구를 강하게, 나이 들어가면, 교육도 신경 쓰고 말이죠. 누군가가 교육에 관심 있으면 새로운 티칭 스킬 만들거든요. 한국에선, 모든 걸 다 요구한단 말예요.

임경순: 지식 변화가 없는 시대, 지식이 권위를 상징하는 시대에는 교수들 그런대로 살 수 있었겠죠. 그러나 현대에 와서 지식 생산 속도가 빨라졌고, 자신의 박사논문이 5년 뒤에 쓰레기가 되는 시대가 됐는데, 남의 것만을 배우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언제까지 배우기만 할 거예요? 가장 확실한 것은 자기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결국에는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사람만이 확실하게 추월하게 되고 살아남게 됩니다. 과거에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이 교수 역할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회: 현실적으로 논문을 통한 교수 평가가 교수사회를 바꿔가고 대학을 발전시켜 가는 점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을까요?

오세정 서울대 교수 "우리나라 대학에서 교육에 신경쓰기 시작한 것은 방향이 맞다고 봐요. 평생교육 시대에 개인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학습능력을 배양해주는 일이 대학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된 거죠."
오세정: 물론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만, 지금처럼 계량화된 평가는 부작용만 초래할 것으로 우려해요. 전문대에서도 논문 편수로 평가한다는데, 그런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건 편하게 가자는 발상이죠. 앞으로의 평가는, 상당히 주관적으로 가야돼요. 논문 편수가 아니라, 학계에서 얼마나 인정받고 있느냐가 평가돼야 한다는 거죠. 노벨상 수상자가 논문 편수로 상 받는 거 아니잖아요. 중요한 업적 그걸로 인정받는 건데. 저희 자연대 정년 심사에서도 더 이상 논문 편수 안 봅니다. 외국 동료 학자들의 평가를 중요하게 본다는 거죠. 교육도 이렇게 가야 하지 않나요. 교수들끼리는 누가 잘 가르치는지 알잖아요. 그런데 그게 계량화하기 곤란하지요. 교육도 학문 특성을 반영한 정성적인 평가, 주관적 평가가 필요합니다. 외국에선,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거든요. 연구실적도 중요하지만 강의 못하면 자격 없다는 분위기예요. 그런데 한국 대학에선 이런 부분이 없었어요. 평가가 사회 지향점을 끌고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 같아요. 논문 편수 드라이브하고 SCI논문 편수 증가한 것도 의미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가면 의미 없는 논문만 양산할 위험이 있어요. 정성적 평가로 전환할 때입니다.

사회: 결국 평가지표가 문제군요. 교수들이 더 능력을 증진하고, 창의력 발휘해서 연구하고, 학생들 헌신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재정적 투자 말고 시스템을 바꾸는 등의 다른 요인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요? 제 생각인데요, 흔히 우리들이 안식년을 국내에서 또는 해외 대학에서 보냅니다만,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카이스트나 포스텍의 물리학과, 화학과 같은 데 가서 보내면 어떨까요. 학문 간의 상호교류, 융합을 위한 시스템을 바꿔가는 노력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창의적 연구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요?

임경순: 그렇게 자발적으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원하지 않아서 안 되는 거 아닐까요. 물론, 대학 측에서도 곱지 않게 볼 수 있겠죠. 관련도 없는 지역, 분야에 왜 가려 하냐? 놀러가는 것 아니냐고 오해합니다. 이런 오해가 싫으니까, 관행대로 하는 거죠. 융·복합 위해 안식년 나가는 교수들, 교수 양심에 맡겨서 새로운 학문 개척 기회를 넓히게 해야 합니다. 과거 배웠던 영역 지식만 갖고는 상당히 어렵게 된 세상예요.  어렵더라도 새로운 영역 도전해서 한 편 내놓는 게 더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새로운 쪽으로 간 사람들에게는 2~3년간 연구논문 없어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어떤가 하면 새로운 쪽 가도 논문은 제한된 기간에 써내야 한다는 거죠. 융·복합 쪽으로 가서 뭔가 해보려 해도, 평가기준이 그렇게 돼 있으니 어렵죠. 그러니 뭐가 제대로 될 수 있을까요. 새로운 학문이 출현할 수 있는 창의적 분위기, 여건은 미숙합니다. 숫자는 발목만 잡습니다.

오세정: 논문 편수 갖고 연연하지 말아야 해요. 미니엄의 기준은 있어야 하지만, 이걸 넘어서는 분들에겐 강제적일 필요가 없죠. 모든 것을 줄 세워서 논문 편수로 평가하려 하잖아요. 사실은 이것을 바꿔줘야 할 때입니다. 지금 정년보장 기준 강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꾸 숫자만 늘리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인데, 퀄리티에 초점을 맞춰야죠. 주관성이 가미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안하면 새로운 논문은 나올 수 없어요. 논문 많이 쓰는 방법은 쉽거든요.

사회: 평가기준을 미니멈으로 해두고, 평균 이하도 있으니까요. 그걸 지속적으로 웃도는 분들에게는 더욱 창의적 연구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자율성을 주자는 오 교수님의 제안은 좋아 보입니다. 

심광현: 특히 융합을 중시하게 될 미래대학에서는 리버럴 아츠의 토대가 필수적입니다. 폭넓은 안목을 길러주는 기초교육의 토대가 약하면 향후 T자형의 창조적 인간을 길러내기가 어려워요. 우리 대학에는 교수 수가 적고, 미진한 분야의 연구를 따라가야 하느라 교수 개개인들의 연구 하중이 큽니다. 따라가는 입장은 이제 지양해야 하는데도 말이죠. 앞으로 강의 토대를 강화하고, 융합형 지식 탐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교수 수를 적어도 OECD 평균 정도로는 늘려야 합니다. 교수가 가장 많은 서울대조차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구미권 대학들에 비하면 크게 부족한 현실입니다. 정부는 이렇게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지 않은 채 교수 역량을 쥐어짜고 있는 데만 몰두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 안팎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사회: 논의가 열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연구나 강의 환경이 열악해서 교수들의 역량을 쥐어짜는 형국이라는 지적은 참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논의의 각도를 틀어서 교수의 연구나 교육 역량을 강화하고 진일보해간다는 명분으로 도입하고 있는 연봉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볼까요. 과연 연봉제가 교수사회에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 걸까요?

오세정: 연봉제 시행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봉제를 시행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봐요. 기본급선에서 연봉제를 시행하고, 성과급은 차등 지원하는 느슨한 연봉제를 생각해볼 수 있죠. 연봉제는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봐요.

임경순: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취지에는 공감하는데요. 옛날 호봉제 같은 걸로 가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거죠. 문제는 성과급이예요. 중요한 것은 도대체 성과급이란 것이, 성과를 어떻게 매기냐하는 거죠. 이것은 교수가 뭐 하는 사람이냐,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과 연동 돼 있는 것 같아요. 미래 사회 교수역할이 뭐냐는 것에 합의가 돼야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성과라는 게 투명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심광현: 이 문제는 교수의 사회적 위상 변화와 함께 고민해봐야 할 거 같아요. 지난 30년 동안 한국에서 회사원이나 언론인 등의 월급은 지속적으로 상승한 데에 반해 교수 월급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아요. 교수의 사회적 위상 역시 아마도 90년대가 피크였던 거 같고, 이후 그 위상은 약화돼 왔어요. 그에 반해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제의 변화, NGO 활동 같은 실천적 요구들이 증가하면서 전문가로서 교수들이 부응해야 하는 일은 늘어났습니다. 성과급 평가 시 이런 공익적 활동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도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뭔가 누리는 것 같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게 지금의 교수들의 삶이예요. 연봉제는 그동안 존속해왔던 교육시스템의 중대한 변화를 의미하는데, 교육시스템에 관한 평가와 새로운 시스템의 목표에 대한 종합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향후 10년의 미래를 전망하는 자리. 고고한 상아탑에 머물러 왔던 교수사회의 자성과 함께 '창조적 멀티플레이어'의 숙명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공감했다. 맨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재목 영남대 교수(사회), 심광현 한예종 교수, 임경순 포스텍 교수, 오세정 서울대 교수.

사회: 지금 대학 안팎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체감 이상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이 변화에 우리 대학들은 문제가 없나요?

심광현 한예종 교수 "사회와 분리된 상아탑이 아니라 상업과 공익적 연결망의 두 팔을 가짐으로써 대학과 사회가 상생하도록 하는 새로운 균형적 시스템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심광현: 90년대의 화두가 정보화,지구화였다면, 지금은 지구적으로 깔린 정보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지식창조사회’가 화두라고 봅니다. 유비쿼터스, 위키피디아, 웹 2.0이라는 용어들은 이미 모든 정보가 네트워크화된 세계에서의 지식 생산 방식의 변화를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학문 분과와 산업 분과들이 갑자기 융·복합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런 지구적 네트워크들의 복잡계적인 자기조직화 덕분입니다. 로봇이 사회적 생산의 핵심동력이 되는 시대, GNR 융합이 가속화되는 시대가 출현하고 있는 거죠. 이런 시대는 우리들에게 창조적 멀티플레이어가 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학은 여전히 20세기의 낡은 분과학문 체계에 갇혀 있습니다. 현재의 변화에 대응하기가 어렵죠.

임경순: 고등교육에서의 변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거 같아요. 하나는 유비쿼터스 교육환경 구축인데, 이제 교육이란 걸 대학이 독점하는 시대는 지난 거 같아요. 더 이상 지식창출 기지로서 대학이 독점권을 행사할 수 없단 뜻이죠. 다양한 지식창출 기관들이 사회 곳곳에서 두터워지면서, 이제 대학은 이들과 제휴하거나 연대를 선택해야 할 지 모릅니다. 다른 하나는 평생교육이 강화되고 있다는 거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게 아니라, 대학 교육을 마치고 사회 생활하다가 40대에 또 다른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이 늘고 있어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것도 고려해야 하겠죠. ‘다시 태어나는’ 대학교육? 이런 개념이 자리잡아갈 거 같아요. 전생애주기적 고등교육이 필요하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세정: 대학이든, 사회든 실용적인 형태로 가겠지요. 지식 전수 방법은 더 이상 캠퍼스 중심이 될 수 없겠죠. MIT의 오픈코스를 듣게 되면, 서울대 올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다면 대학은 지식의 창출 분위기를 만들고, 인재들의 인적 네크워크를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할지 의문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지금 중대한 시점에 진입했어요. 첫째, 글로벌화입니다. 서울대의 경우를 봐도 고유한 역량 있는 인재풀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해외로 빠져나가는 거죠. 학교로서는 인재들을 뺏기는 셈이죠. 일종의 글로벌 경쟁이 시작된 건데요. 여기에 대비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거죠. 학령인구 감소도 문제지만, 이 점을 더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러닝도 사실은 콘덴츠의 문제와 결부돼 있습니다. MIT와 서울대가 동시에 내놓은 어떤 ‘제품’이 있다면, 누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아주 절박한 문제가 제기되는 거죠. 따라서 지금 대학은 어떻게 ‘퀄리티’를 높일 것인가 하는 중요한 의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회: 그동안 사회가 대학을 곱지 않게 본 데는, 뼈를 깎는 자기계발이나 변혁 없이 권위와 전통에 안주하면서 우리의 대학들이 그저 학위장사나 하고, 인맥 네크워크 기지화, 맨파워 제조 판매소 등과 같이 지극히 속물화되고 상업화된 해묵은 부정성 때문일 겁니다. 이제 사회 곳곳에서 게릴라적이고 탁월한 지식 창출기관이 등장하고, 이들이 새로운 엄청난 고급 콘텐츠를 가지고 경쟁해온다면, 그때도 학생들이 여전히 대학을 선택할 것인가, 아주 절박한 질문이죠.

심광현: 결국 콘텐츠의 질과 폭이 문제인데요. 기업들에서 이구동성으로 창조적 콘텐츠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기업과 대학은 콘텐츠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규모가 다릅니다. 단기적이고 상업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기업과는 달리 대학은 장기적이고 공익적 차원을 아우르는 폭넓은 관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당장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콘텐츠를 대학에서 가르치고 만들어낸다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대학이 이런 교육을 못하는 것도 당장 문제이지만 미래를 위한 장기적이고 폭넓은 관점에서 콘텐츠의 연구와 교육에 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미래에는 대학의 중요성이 약화될 거라는 전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러닝이 확대돼도 오프라인 교육이 여전히 중요하듯, 온라인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대면적 방식의 암묵적 지혜의 나눔과 공동의 실험과 토론이 대학교육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봅니다.

"대학이 교육 독점하는 시대 지났다 ... 융합연구 대비하는 세계대학 보라"

향후 10년, 학문-대학 구조 변화 양상

사회: 이야기가 변화의 핵심이 뭐냐는 데로 이어졌군요. 또 대학은 이런 변화에 잘 대응하고 있는 걸까요?
오세정: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저는 변화의 핵심은 글로벌화와 양극화라고 봐요. 대학 양극화는 점점 강화될 텐데 우려스럽습니다. 어디에 서 있을 것인지 준비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임경순: 대학 개혁에는 공감대가 형성된 듯합니다. 그렇지만 개혁 방향이 ‘상업주의’로 가는 것은 우려스럽죠. 기부금, 오버헤드… 지금 대학은 어떻게든 ‘돈’되는 걸 끌어오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어요. 중요한 부분이지만, 방향설정에는 공감할 수 없거든요. 지금 이 변화는 정부에서 강권하는 거예요. 정부가 할 일은 대학들의 지나친 상업화를 견제하고 조절해주는 건데, 오히려 거꾸로 간다는 게 문제죠.  상업적 변화를 평가지표로 삼는 대학 실용주의화,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국가의 대학 관리는 확실히 문제입니다.

심광현: 대학의 상업화가 문제긴 하지만, 좀더 정치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대학과 사회의 연결망은 공익적 연결망과 상업적 연결망 두 가지인데, 그동안 이 두 가지 연결망 모두가 미흡하다 보니, 사회가 대학더러 너 뭐하냐고 다그치게 된 거죠. 현재로는 기업과 정부가 상업적 연결망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이들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대학과 교수들 스스로 사회적 연결망의 중요한 축인 공익적 연결망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소흘히 했잖아요. 자연생태계는 물론 사회·지식생태계가 지금 다 엉망인데 말이죠. 기업과 정부가 요구하기 전에 학문 공동체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사회: 방금, 바깥쪽 문제의식을 대학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지나친 상업화는 경계하자, 사회와의 연결고리에 대해 좀더 섬세하게 고민하자는 말씀을 하셨는데, 설명을 더해 주실까요.

심광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오늘날 대학은 상업적 요구에 지나치게 끌려가고 있어요.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는데, 정부가 이를 조장하는 측면도 큽니다. 정부에게 대학의 공익성을 지켜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대학공동체 성원 스스로 이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주체적으로 노력해야한다고 봐요.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학문적, 교육적 대응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야만 기업과 정부의 상업적 요구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고, 사회와 분리된 고립된 상아탑이 아니라, 상업적 연결망과 공익적 연결망의 두 팔을 가짐으로써 대학과 사회가 상생하도록 하는 새로운 균형적 시스템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겁니다.

오세정: 양극화가 대세라는 건, 미국 쪽도 사정이 같거든요. 아이비리그 대학에 온갖 자원이 점점 더 집중되는 현상을 보세요. 좋은 곳은 더 좋게, 나쁜 곳은 더 나쁘게 돼 가는 거예요. 대학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좀 더 사회와 액티브하게 잉게이지먼트해야 한다는 거죠. 그동안은 대학 혼자서 고고하게 놀았던 거예요. 가만히 있었단 말예요. 잉게이지먼트가 상업화일수도 있지만, 기업과 결합해서 좋은 걸 내놓을 수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도 원칙은 지켜야겠죠. 학내에 쇼핑몰을 유치하는 이런 거는 아니라고 봐요. 지방대도 지역사회와 연계하고, 거점화 가능한 부문을 개발해낸다면 생존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문제해결의 센터 역할 같은 겁니다. 이제는 대학교육이 끝이 아니란 겁니다. 평생교육이 기본적인 게 됐어요. 보통교육화 된 고등교육, 이점을 유념하고 투자해야 할 시점이란 거죠. 근래 교육에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은 방향이 맞다고 봐요. 아직 가시화되지 못한 감은 있지만 말예요. 평생교육 시대, 교육학습능력을 배양해주는 일이 대학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된 거죠. 앞으로 이 부분이 강조될 것 같습니다.

임경순 포스텍 교수 "최근 미술품 진위논쟁으로 교수들의 전문가적 식견이 교수사회 내부에서 조율되지 못하고 법정까지 갔습니다. 지식중재자로서의 교수가 필요해요."
임경순: 그동안 대학이 사회 속에 온전하게 위치를 못 잡은 것이 문제입니다. 사회와의 협력이 요청되고, 더 밀착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상업’적 움직임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겠지요. 문제는 이 움직임조차 양극화된다는 거죠. 돈 많은 쪽, 돈 되는 쪽으로만 몰리니까 공공성은 외면당하기 일쑤죠. 현실은, 최고만이 살아남는 구조로 가고, 공공성, 아까 심 교수께서 말한 ‘장기성’이란 요소에 대한 고민 같은 건, 점점 밀려나는 거죠.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방향, 기존의 구태의연한 학과나 학문에 의존하기보다는 새로운 지적 도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방향은 독일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 보수적인 학문체계 속에서 새판짜기를 시도한다는 건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죠.

대학의 미래,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사회: 자, 이제 오늘 좌담의 핵심인, 우리 대학들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할까요.

심광현: 저는 제도보다 내용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한예종에서 ‘통섭’을 통해 새로운 교육 내용을 만들고자 시도하고 있는데요, 이 용어를 사회생물학 중심의 학문통합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에드워드 윌슨이나 최재천 교수와는 달리 우리는 이를 라틴어 원어의 의미대로 ‘jumping together’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 「원무」에서처럼 한예종의 6개 원(장르)이 함께 손잡고 뛴다면 결과를 예단할 수 없는 새로운 예술적 내용이 창발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거지요. 외국의 주요 대학들과 복잡계 과학을 통해 입증되듯이 이와 같은 새로운 내용의 창발을 위한 학문간 통섭의 흐름은 점점 강해질 거예요. 새로운 지식 생산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거죠.

최재목 "인문학자가 카이스트나 포스텍의 물리/화학과에 가서 안식년을 보내면 어떨까요?"

임경순 "새 영역에 도전하는 교수에게 2~3년간 논문 없어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바꿔야"

오세정 "학과체제 어떻게 바뀔지 논란있지만 전공/학과의 비중을 낮추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심광현 "한국대학의 미래는 수만 명의 교수들이 창조적으로 거듭나는 데 달려 있지 않을까요"

오세정: 한국 대학은 교과부규정상, 교수들이 특정 ‘학과’에 소속되게끔 명시하고 있어요. 학제 연구가 어려운 것도 이와 전혀 무관치 않죠. 미국의 경우, 앤드류 애보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전통적인 엘리트 연구중심대학이 기존의 학문체계를 따르는 학과(학부) 체계를 대부분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리조나주립대의 경우, 미래의 학제간 융합연구에 대비하는 실험을 하고 있단 말예요. 비관하는 쪽, 낙관하는 쪽 논란이 분분합니다. 한예종의 경우도, 그런 실험이 가능한 곳, 불가능한 곳이 있겠죠. 그래서 생각해보면, 문제중심 예컨대 환경오염 이런 거에 대응하기 위해 헤쳐모여하면, 문제 요인이 소멸되면 어떻게 될까요. 분석방법으로 헤쳐모여 하면 어떨까요? 학과 체제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직 논란이 있긴 합니다만,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전공과 학과의 비중을 낮추는 일이죠. 교수들의 자율적 연구·지적 모험과 도전을 장려하는 방안, 학생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등은 사실 논의조차 잘 안 돼 있죠.

심광현: 미래를 위한 두 가지 준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콘덴츠 융합형 연구, 다른 하나는 기초교육을 위한 연구에 투자하는 겁니다. 융합형 연구교육에는 최근 정부가 지원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어요. ‘개론 강의’는  다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백년 전에 나온 건데, 그걸  지금도 쓰고 있는 현실 보세요. 개론 강의는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죠. 한예종과 포스텍은 지난해부터 일종의 실험을 시작했는데, 양교에서 각기 십 수명의 교수들이 참여하여 포스텍에서는 ‘예술의 산책’ 강좌를, 한예종에서는 ‘과학의 산책’ 강좌를 개설했는데, 양교 학생들의 반응이 뜨겁습니다. 이런 실험은 기초교육을 두텁게 만드는 거죠. 이런 융합형 기초교육의 토양위에서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는 거지, 어느날 갑자기 짠하고 새로운 지식이 등장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임경순: 연구와 교육 트랙을 나눠야 할 거예요. 아웃사이드 인턴십. 수많은 기관과 대학이 연계하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대학이 뭘하냐, 학생이 대학에 왔을 때, 이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다른 하나는 캡스턴 경험인데요. 기초만 알았다고 해서 완성품 내놓을 수 없거든요. 비근한 예를 하나 들까요. 최근 미술작품 진위논쟁이 있었어요. 전문가인 교수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서, 그게 법정까지 간 거예요. 교수들의 전문가적 식견이 교수사회 내부에서 조율되지 못하고 법정에 갔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예요. 지식 중재자로서의 교수가 필요해요.

심광현: 대학과 사회는 선순환구조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대학과 사회는 단절돼 있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겁니다. 그런데 대학과 사회가 연결된다는 것이 상업주의적 방식으로만 치달아버리면 결국 양자는 공멸하게 됩니다. 대학이 사회와 연계하는 데는 ‘상업적 활용’이란 방편도 있고, 공공적 역할도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을 강조하기보다, 양쪽 모두에 연결해야 합니다. 두 팔로 사회를 마주잡은 대학, 이런 모습이죠. 진리 탐구는 공공성의 영역에 속하며, 이는 대학 교육과 연구의 자율성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산업적 발전에 기여하는 역할도 함께 가야죠. 그런데 21세기의 새로운 기초예술교육을 위한 우리 학교의 통섭교육 실험은 시작한 지 1년 만에 예산 중단으로 크게 위축됐어요. 이런 일은 대학교육의 자율성을 크게 훼손하는 거죠. 지구적 차원에서 사회가 급변하는 데 대학의 발전을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에 대한 입체적 고민 없이 기존 선입견으로 미래를 위한 실험을 예단하는 단선적 사고가 문제이지요. 

사회: 제 주변에서 자주 듣는 얘기가 ‘프로젝트 중심이 돼 가면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영혼을 팔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에 종속 당하고, 상업화에 물들고, 그래도 돈이 필요하니까 교수들이 제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프로젝트를 따오고, 정부기관, 관공서에 기웃거리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역시 균형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죠?  

심광현: 그렇죠. 대학이나 교수의 역할은 바로 균형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정부나 기업이 대학의 중심이 된다면, 대학은 황폐화할 수밖에 없죠. 교수들이 이런 추세에 끌려 다니지 말고, 오히려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도해나가야 합니다.

임경순: 그런 상업화 방향으로 나가는 대학의 행보를 막아주는 정부 역할이 필요한데 말이죠.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지원이 필요한 거죠.

사회: 다시 이야기가 교수의 역할로 돌아왔습니다. 교수로 살기 혹은 교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어요. 교수들도 스스로의 연구 역량을 상향조정하는데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고, 연구 능력에 따른 빈익빈부익부 현상도 겪고 있고요. 강의평가도 스트레스를 주고, 가정적으로 좋은 아버지 역할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연구와 교육에다 봉사점수도 제대로 맞춰야 하고. 교수란 직업은 이런 고민들을 스스로 중재, 조절해야하기에 상처받지만 아픈 척해선 안 되는 영혼들이 아닐까요.

임경순: 과거 전통적인 대학 교수의 이미지는 司祭의 이미지였던 거 같아요. 여기에 현실의 새로운 요구가 부가돼야 하지 않을까요. 현실 문제도 고뇌하면서 어떻게 사회에 봉사, 기여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이미지 말예요. 앞으로도 이렇게 가지 않을까요.

심광현: 환경 변화에 대한 올바른 적응은 자신을 한 차원 더 창조적인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창조적 진화’일 뿐입니다. 지역만이 아니라 글로벌한 차원에서도 다수준적인 방식으로 사회와 대학을 연결시키려는 능동적 노력이 필요하구요. 균형적이고 입체적인 지식창조, 시스템 창조를 위해 창조적 교수들이 필요합니다. 한국 대학의 미래는 수만 명의 교수들이 바로 이런 창조적 교수로 거듭나는 데 달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광현 

 

 

 <문화과학> 편집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 (사)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사무처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탈근대 문화정치와 문화연구』,『이제, 문화교육이다』등이 있다.

오세정 대통령자문 21세기위원회, 정책기획위원회, 과학기술자문회의, 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다.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과 전국자연과학대학대 학장협의회 회장을 지냈으며, 한국과학한림원 정회원으로 있다.

임경순 독일 함부룩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한국과학창의재단 미래융합문화단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학철학회, 한국물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21세기 과학의 쟁점』, 『지식의 최첨단』등의 저서가 있다.

최재목(사회)교수신문 편집위원. 일본 쯔꾸바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환경철학회 편집위원을 지냈다. 글쓰기 및 철학·인문학에 관한 대중 강의를 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양명학』, 『크로스오버와 인문학』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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