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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존재론의 强勢 추적...플라톤 안에서 플라톤주의 극복 시도
서양 존재론의 强勢 추적...플라톤 안에서 플라톤주의 극복 시도
  • 김재희 대진대 학술연구교수 철학
  • 승인 2009.04.13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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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이정우 지음, 한길사, 2008, 341쪽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이정우 지음, 한길사, 2008, 341쪽

 

희랍 철학에서는 존재에도 등급이 있다. 더 존재하는 것과 덜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더 존재하는 것의 극에는 이데아가 있고, 덜 존재하는 것의 극에는 시뮬라크르가 있다.
희랍 철학이 더 존재하는 것을 중시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 철학이 후자를 높이 평가한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플라톤과 현대철학의 생성론자들 곧 니체와 베르그송을 정교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여느 저작처럼 니체와 베르그송의 손을 적당히 들어주지는 않는다. 신중하면서도 미묘한 입장을 저자는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오늘날이 시뮬라크르의 시대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생성 존재론이 윤리적, 정치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경우처럼 되기의 실천철학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견고한 생성 존재론을 배경으로 구체적이고 새로운 윤리 정치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실재란 무엇인가. 이는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서양 존재론의 역사는 이 문제를 둘러싼 담론 투쟁의 드라마였고 이 드라마는 지금도 상연중이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은 이 드라마가 펼쳐지는 아고라광장을 플라톤주의와 反플라톤주의의 토론장으로 놓고, 플라톤이 대표하는 신족의 주장과 니체-베르그송이 대표하는 거인족의 주장을 그 토론의 범례로 보여주는 책이다. 신족이 영원불변의 이데아를 근본 실재로 놓고 생성 소멸하는 삶의 세계를 시뮬라크르로 폄하하는 ‘형상존재론’을 주장한다면, 대지의 자식들인 거인족은 오히려 끊임없이 생성 변화하는 시뮬라크르야말로 실재의 위상을 지닌다고 ‘생성존재론’을 제시한다. 저자는 비교적 꼼꼼한 텍스트 읽기를 통해 플라톤의 입장(1부)과 니체-베르그송의 입장(2부)을 차례로 검토하면서 서양 존재론의 강세가 어디로 이행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선, 저자는 현대 철학의 反플라톤적 성향에 대해, “플라톤을 읽는 것은 철학함의 통과의례”이며 이를 거치지 않았을 때 “한국 지식계에서 확인되는 숱한 지적인 혼란스러움과 천박함”이 야기된다는 점, 플라톤은 그리 “간단히 물리쳐야 할 인물로 치부”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 시대를 “시뮬라크르의 시대”로 정의하는 저자는 이 ‘시뮬라크르’의 이중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개념적 뿌리인 플라톤의 이미지 개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생성하는 것’으로서의 ‘시뮬라크르’와 ‘인공적 모방’으로서의 ‘시뮬라시옹’은 모두 플라톤의 이미지 개념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전자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니체-베르그송에 의해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고 후자는 사회문화론적 맥락에서 보드리야르에 의해 계승된다는 것).

저자는 『소피스테스』편의 변증법적 논증 과정을 따라가면서, 플라톤적 형상존재론이 어떻게 구축되는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플라톤이 플라톤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일탈해 나아간 대목”에 이르는지도 보여주면서, 플라톤 안에서 플라톤주의 극복의 씨앗까지 읽어낼 수 있음을 강조한다.

‘플라톤주의 전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니체는 형상존재론으로부터 생성존재론으로의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저자는 형이상학 극복을 주제로 한 하이데거적 니체 해석에서 간과됐던 ‘당대 자연과학(열역학 제1법칙과 진화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영원회귀와 역능의지(권력의지가 아니다)를 해석하면서 “니체의 생성존재론은 곧 (‘생명’과 ‘삶’을 포괄하는) 生의 존재론”임을 역설한다. 니체의 철학사 비판이 ‘거칠다’는 지적(전거를 제시하지 않는 부정확한 인용과 인신공격에 가까운 소크라테스 비판, 명확한 논증 없이 “기독교 비판을 철학사 전체에 투영”한 점 등), 그리고 니체의 실천철학이 과연 “서구를 떠나 세계사적 지평에서의 윤리학/정치(철)학이 될 수 있는가. (...) 단순무식한 호메로스적 ‘영웅’들이나 끝없는 욕망에 휘둘리는 로마의 군벌-마초들이 미래 삶의 모델이 될 수 있는가”하는 비판적 문제제기는 탈근대적 니체 이해의 과도한 미화 경향에 일침을 놓는 듯해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재구성해 읽어가면서 “니체의 경우 보다 훨씬 정치한 생성존재론의 기본 논변들”을 정리하고 생성존재론의 요체를 제시한다. 베르그송의 기계론 비판이 복잡하고 유연한 현대 기계론의 관점에 볼 때 낡은 비판이라는 것, 자연적 맥락과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존재론적 분절을 형성하는 ‘개체성’의 특이성을 베르그송이 폄하했다는 것, 베르그송의 윤리는 “대중들을 모방자들로 만들 뿐 진정한 윤리적 주체로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들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가자면, 베르그송과 플라톤의 차이를 단적으로 표현해준다고 저자가 언급한 “la gen?se id?ale de la mati?re”는 저자가 해석한 것처럼 “물질을 통한 형상 발생”이 전혀 아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이 즉자적으로 주어져 있으면서 질료에 구현되는 반면에, 베르그송의 형상들은 생명과 물질의 타협물로 생성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창조적 진화』 3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그 구절을 이 맥락에다 그렇게 붙여놓을 순 없다. 그 구절은 정확히 말해 ‘물질의 관념적 발생’이다. 이는 지성의 도식에 부합하는 물질이 어떻게 발생하느냐를 해명하는 부분, 즉 (물질을 수축하는) 생명의 힘을 추상(제거)시키면 공간의 방향으로 이완하고 있는 물질이 드러난다는 논증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형상철학이 단순히 극복의 대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니체-베르그송의 생성철학도 완벽한 대안인 것은 아니라고 평가하는 저자는, 결국 어디에 서서 이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동일성의 철학과 생성의 철학은 대립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反面”이며 “생성의 철학이 동일성(의 변화)을 설명해주어야 하듯이, 동일성의 철학은 생성(의 존재)을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균형을 잡으면서도, “생성의 철학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을 정교화하는 점에 있지만, 동일성의 철학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그 동일성을 열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생성존재론이 더 근본적인 입장임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저자는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의 길에서 다시 ‘생성으로부터 존재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며, “동일성의 변화과정에 대한 설명”과 “생성의 바탕 위에서 윤리적-정치적 입장을 세우는 작업”을 현대 생성존재론의 양대 과제로 설정한다.

전자는 니체-베르그송의 생성존재론에서 구체화되지 못했던 개체성들의 생성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새로운 생성존재론에 걸맞는 (니체-베르그송에게서 빈약했던) 윤리/정치적 실천철학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과제의 실현 가능성을 저자는 이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에서 찾고 있다. “확고하고 수준 높은 생성존재론의 바탕 위에서 구체적인 윤리학적-정치학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던 최초의 경우”라고 평가하면서 결국 저자는 이들의 철학을 현대 생성철학의 모델로 삼고 플라톤과 니체-베르그송의 대결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물질과 기억: 반복과 차이의 운동』 등의 저서와 『베르그손에서 잠재성과 물질의 관계』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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