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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와 절망 사이, 巨匠의 힘이 발산되는 곳
유희와 절망 사이, 巨匠의 힘이 발산되는 곳
  • 홍지석 객원기자
  • 승인 2009.04.06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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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 페스티벌(3.11~5.15)

올해는 반연극의 기수 외젠 이오네스크(1909~1994)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현재 대학로 등지에서 이를 기념하는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 페스티벌’이 한창이다.
지난 3월 11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된 성남아트센터에서의 단막극 시리즈 공연을 시작으로 대학로 게릴라 극장과 스튜디오 76에서 5월 10일까지 모두 7개의 극단이 이오네스코의 굵직한 걸작들을 무대에 올린다.

이 가운데 「의무적 희생자」는 이오네스코가 한국을 방문했던 1977년에 이미 국내에 번역 소개됐지만 그동안 공연되지 않다가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다. 페스티벌 행사의 일환으로 「이오네스코와 현대연극」을 큰 주제로 내건 학술대회도 열릴 예정이다. 이 학술대회는 4월 6일 오후 1시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열린다. 여기서는 「이오네스코 연극의 실험정신」(박형섭, 부산대), 「부조리연극과 이오네스코」(오세곤, 순천향대) 등의 주제가 다루어질 예정이다.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장인 서명수 예술총감독에 따르면 이 페스티벌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이오네스코의 작품을 공연함으로써 특히 한국현대연극에 큰 영향을 미친 그의 업적을 기리고 현재 우리 연극계에 유익한 자극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기획됐다. 

극단 우리극연구소의 「코뿔소」 공연 장면. 오동식이 연출을 맡았다.


과거 1960년대에 한국 문화예술계, 더 나아가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오네스코를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점으로 이렇게 새삼 다시 주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는 아마도 영국 비평가 에슬린이 지적한대로 “통합된 원칙을 잃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느끼는 인간존재의 우주적 상실감을 표현한다”는 이른바 부조리극의 지향과 상황 인식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상연된 시기는 4·19혁명이 일어난 해인 1960년 11월이다. 한국 현대 실험연극의 산실이었던 실험극장의 창단공연 「수업」이 바로 그것이다. 허규가 연출한 이 공연은 국내 최초의 부조리극 공연으로 기록돼 있다. 서연호 고려대 교수(국문학)에 따르면 이오네스코를 위시한 부조리 연극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이 무렵 전개된 소극장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69년 개관된 카페 떼아뜨르를 이어 잇따라 등장한 카페 극장들, 그리고 속속 개관된 소극장들은 새로운 작품에 새로운 관객을 수용하려 했고, 이러한 의도에 부조리극은 더할 나위없는 레퍼토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오네스코의 작품이 국내에서 처음 상연되고 40여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애매하고 난해한 연극으로 악명(!)높았던 이오네스크의 반연극, 또는 부조리극은 꾸준히 상연되면서 다른 모든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그러했듯 익숙한 고전이 됐고, 충격을 주는 대신 즐김의 대상이 됐다. 반연극이 연극을 대표하게 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와 맞물려 애초에는 아방가르드적 실험의 무대로 기획됐던 소극장 역시 중요한 연극무대로 정착했다. 「이오네스코 탄생 100주년 페스티벌」이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을 ‘어떤 작품보다 재밌는 유머와 놀이가 있는 연극’으로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상연되는 부조리극은 대개 아이러니컬하게 논리적 언어를 해체하는 부조리극의 언어유희가 갖는 양면성, 곧 비극성과 희극성의 기묘한 공존이라는 특성 가운데 희극성을 유독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난해한 부조리극이 어떻게든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다. 이에 관해 게릴라 극장에서 상연된 「코뿔소」에 대한 김정수 극단 말걸기 대표의 다음과 같은 발언, 곧 “이 공연은 확실히 희곡분석 내지는 인물분석보다는 형상화 내지는 분위기 창출에 좀 더 비중을 둔 것 같다”는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역시 부조리극은 부조리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관객을 쓴웃음 짓게 하는 부조리극 특유의 뒤끝은 여전하다. 이것이 거장의 힘이다. 평화로운 마을에 코뿔소가 등장한 뒤 마을 주민들이 속속 코뿔소로 변신하고 한 명의 소시민이 투쟁을 벌이게 된다는 「코뿔소」 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렇다. 모두가 코뿔소로 변한 가운데 혼자만 인간으로 남는 절망 속에서도 “지지 않겠다”고 외치는 주인공 베랑제의 굳센 다짐 앞에서 관객들은 실소한다. 하지만 거기에 오늘 한국 사회 지식인의 현실이 있다는 것, 즉 현란한 논리적 언사 속에서 아닌 듯 위장하지만 사실은 대세에 굴복하고 협조하는 지식인의 자화상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실소는 실소일 수 없다. 특히 「코뿔소」의 주요 무대가 신문사이며, 주인공 베랑제의 직장이 바로 그 신문사라는 것은 오늘날 한국 언론의 모습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극중 보따르(보따리)는 표영신(병신)과 뒤다르(뒷다리), 데이지(돼지)에게 외친다. “난 신문기자를 믿지 않아!”

홍지석 객원기자 kunst75@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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