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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독백의 城寨를 나오며
[學而思] 독백의 城寨를 나오며
  • 김기승 순천향대·한국사
  • 승인 2009.04.06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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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교양 국사 교수로 부임해 왔으나 몇 년 후 국사 과목은 변경 또는 폐지됐고, 교양학과는 해체됐다. 이제는 대한민국에 하나 밖에 없는 국제문화 전공에 소속돼 역사가 아닌 문화 강좌를 담당하고 있다.
부임 후 얼마간은 전통적인 강의로도 학생과 소통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독백을 하고 있다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됐다. 이때부터 학생들과 소통은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학생과의 소통 외에는 교육자로서 정체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울타리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배운 역사학적 지식이나 역사학 연구자 집단은 교육 현장에서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개인을 위한 그리해 학생 자신에게 필요한 역사적 지식을 새롭게 찾거나 만들어내야만 했다. 고민 끝에 발표와 토론 위주의 수업을 진행했다. 토론식 수업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말이나 글로 표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발표나 토론은 항상 기대했던 것에 미치지 못했으며, 이에 잘못을 고쳐주고 미비한 점을 채워주는데 신경을 썼다. 이러다보면 어느 덧 혼자 말하게 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에 과감하게 전통적 의미의 ‘교육’을 포기했다. 오직 학생들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이며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자.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주제로 함께 대화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자고 했다. 선생은 학생들의 조력자에 머문다. 학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농담이든 거짓이든,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흉내내든 그 모든 행위들 속에서 학생의 생각과 마음을 우선 찾아내자.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대안을 제시해보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하자 학생들의 반응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생이 자신들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것, 동일한 내용을 자신이 말할 때와 선생이 말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하게 됐다. 이러한 차이를 알게 되는 것 자체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앎의 출발점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자, 자기 생각과 기존의 지식과 정보들을 관련짓기 시작했다. 이에 이러한 관련짓기를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는 다양한 방법들은 구체적으로 예시해 주었다. 이 방법도 처음에는 일방적인 가르침이었지만, 학생들 스스로 질의와 토론을 통해 문제점과 해결책이나 대안을 제시하도록 유도했다. 여러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그럴듯한 논리적 주장이 몇 가지 마련됐고, 이 중 자신에게 가장 부합하는 결론을 선택하도록 지도했다.

글쓰기까지 지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연구실로 따로 불러 문장 하나하나마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인하면서 적합한 문장이나 단어를 제안하고 본인의 판단을 물었다. 이러한 식으로 수업을 하게 되면 1학기 내내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함께 자료를 찾고 함께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교수와 학생 사이의 대화는 수업 시간에 국한하지 않고 학기 내내 이루어진다.

토론식 수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소수여야 했다. 개인별 혹은 조별 최소한 3회의 발표를 하도록 했는데, 이를 알고는 절반 이상이 항상 수강신청을 변경해서 10여명 내외가 됐다.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1학기 동안 탐구할 주제를 선택하도록 하며, 발표의 형식과 방법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한다. 특히 주제 선정에 있어서는 차후의 학업이나 진로와 관련된 주제를 정하도록 유도하며, 발표 방식도 신상품 개발, 새로운 사업 구상, 학술 논문, 르포기사, 작업일지, 신문, 전시회, 블로그, 홈페이지, 프리젠테이션, 공연 등 자신이 선택하도록 한다. 이런 방법은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란 바로 자신의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또 내 자신에게는 매학기 새롭게 공부해야 할 과제가 주어지며, 미처 알지 못했던 지식과 정보들을 학생들을 통해 배우는 효과도 있다. 이제 나는 교수라기보다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다. 대화식 교육의
지적 수준에서 오는 공허감은 인터넷 가상강의로 대리충족을 한다. 여기서는 가장 훌륭한 학생이 수강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전통적 의미의 지식 중심의 강의를 진행한다. 학창 시절 꿈꾸었던 역사 교수의 모습은 가상공간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김기승 순천향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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