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2:15 (토)
라이트·미스·꼬르뷔지에, 그들에게서 풍기는 韓屋의 향기
라이트·미스·꼬르뷔지에, 그들에게서 풍기는 韓屋의 향기
  • 김종헌 배재대·건축학
  • 승인 2009.03.30 1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장] 한국건축, 서양근대건축에 영감 줬다

“근대건축사는 근대건축에 관한 재해석의 역사”라고 할 만큼 근대건축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발표되고 있다. 커티스(William J.R. Curtis)는 근대건축이 전통과 단절을 시도했다는 시각은 ‘시대정신’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의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건축역사가들이 근대건축에 대한 관점을 “신선하고, 새롭고, 처음 시도한 것”을 과시하고 싶다는 열망 속에서 근대건축을 고립시키고, 단순화하고 그 독특함을 강조함으로써 이전시대의 건축이 미친 영향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는 근대건축이 13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동서양 문화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관점을 지녀왔다.


즉 근대건축에 나타나는 극동아시아 예술과 건축과의 유사성이 근대 건축가들의 영감에서 우러난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발견이라기보다는 동서양 문화교류를 통한 새로운 문화에 대한 이해와 재해석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는 시각이다. 나는 가급적 한국건축과 근대건축과의 대비를 통해 이러한 특성들을 분석해 왔다. 이 글에서는 극동아시아의 전통건축 특히 한국건축이 근·현대건축의 건축어휘로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함으로써 전통건축을 현대생활과 단절된 입장이 아닌 연속성을 지닌 새로운 관점에서 강조하고자 한다.

기하학적 정형에서 ‘의도된 불규칙성’으로

1274년 몽골의 상두(商都)에 도착한 마르코 폴로는 당시 쿠빌라이 칸의 여름 거처를 유럽 사람들에게 전했다. 또 존 만데빌 경은 그의 여행기에서 텐트와 실크 선으로 이뤄진 가벼운 재료, 황금빛의 열주와 기둥, 다양한 색채로 빛나는 벽체, 해체와 분해 조립이 자유로운 구조시스템, 초원 위에 세워진 정자와 그 속에서 편안하게 즐기는 동방 사람들을 묘사했다. 이 여행기는 유럽 사람들에게 동방(Orient)에 대한 이미지를 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368년 이후 몽골의 폭동, 유럽의 흑사병과 백년 전쟁 등으로 동양과의 소통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1498년 인도로 가는 바다 길을 발견했고,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동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났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나이홉(Jan Nieuhof)을 통해 중국을 생생하고 정확하게 그려내게 했다. 나이홉은 불규칙한 지형의 형태를 그려 넣었고 아치와 탑, 교량 등과 함께 작은 사원(temple)과 누각(pavilion)에 주목했다. 또한 사진첩이 펼쳐지듯 주의 깊게 구성된 전경의 중국조경에 관심을 가졌다. 한눈에 시야가 펼쳐지는 기하학적이고 정형적인 기존 유럽정원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 개념은 18세기 중엽 영국정원을 신와즈리(Chinoiserie)라고 하는 불규칙한 구성방식으로 바꾸는 중요한 기법이 됐다.  템플(William Temple)은 중국정원이 작은 언덕, 구불구불 휘어진 산책로와 개울, 폭포, 기암괴석, 호수, 다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정자 등이 포함됨을 알았다. 템플은 이를 “의도된 불규칙성”이라고 하면서 사라와지(Sharawadgi)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나이홉이 중국정원과 건축에서 불규칙을 발견했다면 템플은 그러한 불규칙성의 의미와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또 챔버즈( Sir William Chambers)경은 큐(Kew) 정원을 통해 그가 생각한 중국건축을 구현해냈다. 중국건축의 기둥과 공포 구조를 서양의 기둥 양식을 나누듯이 다양화했다. 즉, 그는 중국건축을 정교하게 유럽건축에 통합시켰다.

이후 동양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은 1760년~70년대를 경계로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빅톨 위고는 “루이 14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그리스 애호가였으나 이제는 모두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이다”라고 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됐다.

동양에 관한 관심은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과 기호의 수준을 넘어서서 19세기에 세계박람회를 개최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는 새로운 사회상과 동아시아 문화를 대중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우리나라는 1893년 시카고박람회와 1900년 파리박람회에 조선관을 출품한 바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와 한국과의 관계는 시카고박람회의 조선관에서 비롯됐다. 한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경험은 일본제국호텔 설계과정 중 자선당 온돌에서 시작됐다. 이후 그는 온돌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방식으로 생각해서 허버트 제이콥 주택(1936~37) 등 미국의 중산층을 위한 유소니안 주택에 구현했다. 라이트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그가 소유했던 십장생도와 구겐하임 미술관 작업 중 머물렀던 호텔에 놓아둔 조선백자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금까지 라이트와 일본과의 관계 연구는 상당히 이뤄졌다. 그러나 거실을 중심으로 확장해나가는 라이트의 주택은 공간이 겹겹이 둘러싸여 패쇄적인 일본 주거보다는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연결되면서 외부 마당으로까지 확장되는 한옥의 평면구성과 더 연관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미스 반 데르 로헤(1886~1969) 역시 동양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담양 소쇄원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잘 구현한 사례인데, 미스의 판스워드 주택 역시 소쇄원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미스가 건물과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냈는가는 래이크 쇼 드라이브 아파트먼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이미 300년전의 건물인 병산서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벽체와 개구부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창호시스템의 융통성은 이를 능가한다.

르 꼬르뷔지에(1887~1965)의 경우 그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와 병산서원 만대루(왼쪽 아래 사진)는 개념적으로 유사하다. 그의 스승이었던 어거스트 페레가 프랭클린가 아파트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목조시스템과 유사한 구조를 활용한 것이 1900년 파리 박람회 이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때 전시됐던 극동아시아 건축의 목가구 결구방식이 영향을 주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꼬르뷔지에의 롱샹 성당과 부석사의 지붕선(사진 위)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러나 이들 근대건축의 3대 거장보다동아시아 건축구조의 경쾌함, 평면과 내부 공간의 기능성, 주변경관과의 관계, 공기 순환 및 환경적 측면, 대나무 구조의 유기적 특성 등을 먼저 주목했던 이들은 이들에게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던 로지에(1713~69)와 비오레 르 뒤   ㄱ(1713~69)이었다.

병산서원, 부석사에 담긴 근대성

나의 연구는 서양근대건축이 한옥과 너무나도 유사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또한 서양근대건축이 자신의 고전건축을 부정하면서부터 시작했다는 점도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13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인식과 해석을 기반으로 서양화해나갔던 것이 서양의 ‘근대’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근대가 ‘서구화’라고 한다면 서양의 근대는 ‘동양화’인 셈이다. 다만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동양’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서양에서 동양에 대한 관심은 ‘근대’를 낳게 됐고, 결국 ‘동아시아 진출’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와중에 한국건축은 중국건축이나 일본건축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건축은 과장된 중국적 분위기나 혹은 절제되며 긴장된 일본의 분위기보다는 이들이 잘 조합된 한국건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글에서 한옥이 ‘근대건축의 뿌리’라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옥을 지나치게 고답적으로 보거나 특별히 고상한 취미를 위한 집이 아닌 현대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집임을 이론적으로 밝혀보고자 했다. 한옥과 근대건축의 관련성은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건축에 대한 이상(?)이 유럽보다도 한국현대건축에서 보다 더 보편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점에서도 느낄 수 있다.

□ 이 글은 <대한건축학회 논문집>(2009. 2)에 실렸던 「17세기∼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의 극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근대건축이념 형성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를 필자가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김종헌 배재대·건축학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냈으며, 『한국 건축의 이해』등의 저작이 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현재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