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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물의 미학
[學而思] 물의 미학
  • 남기탁 강원대
  • 승인 2000.12.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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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11 09:36:14
남기탁/강원대 국어학

이즈음 세상은 온통 소음 속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살기 어렵다는 아우성 소리가 연일 들려온다. 경제 위기에 대한 선언이 거듭 반복되고 정부의 목소리는 국민들이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야 한다는 대목에서 자꾸 높아만 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래저래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다수의 서민들일 뿐이다.
들여다보면 진짜 세상 돌아가는 꼴이 신기하기만 하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매일매일 접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IMF 사태가 던진 충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은 우울증을 앓으며 삶에 대한 관심을 조금씩 버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즈음에 이르러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지표들이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화'라는 절대 명제가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앗아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우리 앞에는 지향해야 할 그 어떤 이념과 가치도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의 삶이 이 지경에 떨어진 것인가. 자탄의 목소리는 높지만 책임있는 대답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요즘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떠올리노라면 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는 한 장의 우울한 풍경화가 저절로 떠오른다. 모든 길들이 다 지워져버린 안개 가운데 서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란 어떤 것일지. 그런 저런 상념에 떨어질 때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무심코 펼치게 된다. 老子의 '道德經'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는 웬 신선놀음이냐고 입을 비죽거릴지도 모르지만 먼 시간 속에 깃들어 있는 노자의 목소리는 내 앞에서 잠시나마 세상의 혼탁함을 말끔하게 걷어가 버린다.
책을 열고 노자를 따라 터벅터벅 도덕경의 세계 속으로 걸어가 보라. 거기, 노자의 뒤를 따라 걷는 나의 발걸음이 오래 머무는 구절이 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능히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한다"라는 대목에 이를 때 내 마음은 그지없이 편안해진다. 물의 성질은 투명할 뿐더러 유연하다. 물은 그 자체가 순리이며 상식을 존중하는 삶을 늘 일깨워 주는 존재인 것이다. 나의 삶의 터전인 춘천의 자랑 중의 하나도 물이다. 깨끗하면서도 풍부한 춘천의 수자원은 여행객들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수려한 풍광에 둘러싸인 춘천이라는 도시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삶의 한 가지 모범을 보여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계곡의 바위틈 사이를 흘러 내려와 호수를 만들고, 강을 이루기도 하는 물의 흐름은 사계절의 변화를 따라 유유히 전개되는 순리와 상식의 세계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순리와 상식의 진리가 존중되어야 할 터이다. 특히 작금의 대학 현실을 염두에 둘 때 이는 절실한 요구이다. 대학의 가치와 역할을 과연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대세만을 쫓아 현실을 그대로 추수하는 태도에서 나온 방안은 시간이 경과하면 서서히 부작용을 드러낼 것이다.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학문이라면, 인간 자신을 探究하고 啓發하기 위한 지식을 버리고 어찌 학문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우려되는 광경이다.
인류사의 전개는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인간이 행복할 수 없으며 그 사회 또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의 행복이란, 현실의 삶과 내면적인 정신의 삶의 일치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서 현실의 방편이거나 도구로만 사용되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바른 길이 아님은 명백하다. 진정한 학문은 앎과 삶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것은 이상과 현실을 매개하고 이론과 실천의 합일을 꾀해나가는 중단 없는 작업이다.
앎과 삶의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순리와 상식의 가치부터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순리와 상식을 존중하지 않는 개인의 삶과 사회는 온전하게 작동할 수 없다. 우리의 시선을 강이 되고 바다를 이루는 하나의 흐름 위에 둘 때 그로부터 우리 모두는 물의 미학을 겸허한 마음으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남기탁 <강원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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