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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 건강 신드롬 변천 통해 본 건강 담론의 흐름
[흐름] : 건강 신드롬 변천 통해 본 건강 담론의 흐름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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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26 10:23:11
전국에 채식 열풍이 거세다. 고깃집은 한산하고 유기농 야채값이 뛰어오른다. 갑자기 튀어오른 이슈에는 늘 즉각적인 반대 급부가 따르는 법, 아니나다를까 ‘극단적 채식은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부랴부랴 밥상을 채소밭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지 못하는 사실 하나, 채식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굳이 채식주의자라는 명함을 내밀지 않아도 먹을거리에 대한 건강한 고민을 해온 이들은 많다. 언론이 주목하든 말든 환경과 미래를 생각하는 고된 식습관을 묵묵히 실천해온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채식은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 채식 열풍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몸과 마음을 함께 치유하는 근본적 문제의식에 가 닿지 않는 지금의 채식 열풍은 그리하여, 하나의 ‘신드롬‘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건강 신드롬

신드롬이란 말의 본래 뜻이 ‘어떤 공통성이 있는 일련의 병적 징후’를 총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할 때, ‘건강 신드롬‘이란 말의 조합부터가 이미 지독한 아이러니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 사회는 이미 건강의 담론을 신드롬이 이끌어가는, 기이하도록 병적인 증후군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암울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건강 신드롬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서울대 규장각 문헌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건강 신드롬으로 기록될 만한 사건은 이른바 ‘蔘茸膏 보약사건’이다. 인삼과 녹용을 위주로 지은 삼용고란 보약이 18세기 후반 정조대의 조선 전역을 휩쓸었다고 한다. 약재 시장이 활성화된 조선 후기에는 和劑(지금의 처방전)만 있으면 누구든 약을 살 수 있었다. 일회용인 지금의 처방전과 달리 한 번 손에 넣으면 두고두고 약을 지을 수 있었기에 좋은 화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평양에 거주하는 한 의사가 지은 보약을 먹고 팔순 노인의 눈이 밝아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른바 삼용고 신드롬이 시작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보약 한 제 가격이 서울의 양반집 두 채를 살 수 있는 7백 냥에 달했다는 사실.
현대적 의미의 본격적인 건강 신드롬은 1980년대 말 재미 의학자 이상구 박사로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채식 열풍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 육식 반대로 알려진 이상구 박사의 ‘뉴스타트 건강법’으로 문 닫는 고깃집이 속출했고 특히 완전식품으로 믿어왔던 우유는 그야말로 만병의 근원처럼 취급됐다. 유제품을 만드는 기업들에게 이상구 박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오죽하면 단팥죽이나 식혜 같은 전통 식품을 만드는 한 기업은 인터넷에 올린 기업 소개에 ‘…89년 이상구 파동으로 주력중이던 유제품 사업에 엄청난 타격을 입어…’라는 문구까지 집어넣었을 정도.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이상구 박사의 건강 신드롬은 어느샌가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이상구 신드롬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94년부터 한 일간지 칼럼을 통해 조용히 일던 ‘안현필 신드롬‘이라는 것이 있었다. 유명 학원의 영어강사인 그의 건강법인 초콩, 현미식, 된장 등이 소개되면서 현미와 콩 소비가 갑절 늘어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90년대 미디어타고 열풍 번져

90년대 후반 꼬리를 물 듯이 신드롬들이 줄을 이었는데, ‘신바람 건강법’, ‘허준 신드롬‘, ‘먹지마 건강법’, ‘김홍경 신드롬‘ 등이 9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온 대표적인 신드롬들이다. 매실 열풍, 한의학 열풍을 일으킨 허준 신드롬은 다 알다시피 TV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치솟았다가 드라마가 끝나면서 자연스레 잦아들었다. 먹지마 건강법과 마이너스 건강법 등은 모두 먹을거리를 ‘가려먹고’ ‘안 먹고’ ‘적게 먹으면서’ 영양과잉으로 일그러진 몸을 치유하자는 것. 황수관 박사는 신바람 박사로 불리면서 웃음=만병통치약이라는 건강법을 설파했다. TV 프로그램 패널로 나와 활동하면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신바람이란 말도 시청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김홍경 신드롬도 빼놓을 수 없다. 파격적 외모와 어법으로 TV 명강사로 떠오른 한의학 박사 김홍경은 기존의 건강 상식을 뒤엎는 신선한 발상과 오랜 야인 생활로 터득한 자신만의 한의학을 설파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위에 열거한 신드롬들은 특정한 시기, 특정 ‘스타’의 등장과 함께 지고 새는 것들이지만 이미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돼 신드롬의 개념조차 빌지 않은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력 신드롬‘과 ‘다이어트 신드롬‘. 불특정 다수에게 신봉되면서 시시각각 다양한 방법, 다양한 ‘상품’들이 개발된다는 것, 끊임없이 지탄받고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도 꿋꿋하게 흔들리지 않고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사회 대표 신드롬이다.
위에서 살펴본 신드롬들은 일정한 패턴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언론의 힘이 절대적이라는 것. 이상구 신드롬, 황수관 신드롬, 김홍경 신드롬에서 채식 열풍까지, 어느 것도 방송 매체에 힘을 빌지 않은 것은 없다. 둘째 반드시 반대 담론이 함께 따른다. 사이비 혹은, 학계의 권위에 떨어진다는 전문가의 이견 형태로, 혹은 음해성 소문의 형태로든 말이다. 셋째, 관련 업종이 폭발적으로 호황을 누린다. 매실이 동이 나다못해 덜 익은 살구를 매실로 착각하고 살구나무를 작살내버렸다는 웃지 못할 기사는 허준 신드롬이 아니었다면 등장하지 않았을 해프닝이다.
넷째, 신드롬이 생길 때마다 절대적인 매니아층이 형성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다섯째, 신드롬이 신드롬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특징은 시간이 지나면 언론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자연히 그 열풍이 수그러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애초 병적 징후를 띨 수밖에 없는 신드롬의 서글픈 운명일 것이다.

자발성 결여된 조작된 관리방식

이종찬 아주대 교수(의학)는 현재 불고 있는 각종 건강담론과 신드롬을 앤서니 기든스의 ‘자아정체성(self-identity)’ 개념을 들어 설명한다. “예전에는 건강 문제가 질병과 관련했을 때만 부각되었지만 지금의 건강은 자기 만족의 실현과 자기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전략이 되고 있다”는 것. 동네마다 있는 에어로빅장과 핼스클럽, 더욱 고급스럽게 치장해 대중적으로 파고드는 외국 기업의 피트니스 클럽이 대표적인 예이다.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리할 수 있는 ‘자기 테크닉’의 한 수단으로, 자기 만족과 동시에 사회적인 규격에 맞는 몸을 만들어가는 조작된 관리방식으로서의 건강 개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몸 관리 방식들이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조작된’ 방식이라는 것.
사회가 바라는 규격에 맞게 끊임없이 몸을 조작하고 싶은 대중의 욕망과, 그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의 논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신드롬은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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