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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판 소식] ‘민주주의의 몰락’, 거부할 수 없는 대세?
[해외 출판 소식] ‘민주주의의 몰락’, 거부할 수 없는 대세?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23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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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Todd, 『APRES LA DEMOCRATIE』Editions Gallimard┃ 2008│257쪽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은 요즘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일시적인 보수 정권의 출현이나 경제위기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동시에 인구학자이기도 한 엠마뉘엘 토드는 최근 저서인 『민주주의 이후』에서 프랑스와 서구 사회를 감싸고 내입해오는 일련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민주주의 시스템의 소멸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시스템이 그것(민주주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토드는 1976년 약관 27세의 나이에 『최종적 몰락 : 소비에트의 몰락에 관한 시론』으로 소련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책에서 토드는 출산율의 저하를 중심으로 다양한 통계 지표를 통해 소련의 역사적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냉정히 기술하면서, 특유의 실증적 성향을 나타냈다. 이후 토드는 한 공동체(국가, 민족, 지역)의 가족 체제 유형이 그 공동체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내세우며, 이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잇달아 내놓게 된다.

가족 모델을 포함한 중층적 체제 분석


그 성과는 다음과 같은데, 일단 1988년에 출간된 『새로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각 지방의 정당 투표율이 그 지방의 대표적인 가족 유형이라는 변수에 종속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1990년 출간된 『유럽의 발명』에서는 유럽 각국과 각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적 다양성은 4가지의 대표적 가족 체제(부모-자식 관계의 권위/비권위성, 형제간의 관계의 평등/불평등성의 조합에 의한 4가지)라는 결정인자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점을 치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가족 체제인 독일은 교육, 경제성장 등에서 높은 성과를 보였지만, 파시즘 등이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 반면 비권위적이고 평등한 가족 체제인 프랑스 파리 분지와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창궐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토드의 연구는 대단한 지적 충격을 안겨 주었고,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연구틀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 토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 제국주의, 세계 경제, 이민자 사회 등 보다 정세적인 문제에 대해 문제작을 내놓으며 학문적인 입지를 더욱 다지기 시작했다.

최근 출간된 『민주주의 이후』역시 그러한 중층적 연구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토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과 가족 구조의 변화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토드는 종교의 사회적 힘이 ‘공허’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했으며, 교육의 약화로 문화적 비관주의가 지배적이며, 과두제에 가까운 사회 계층화의 재출현, 세계화로 인한 자유교환의 충격, 계급투쟁 격화 가능성 증대 등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곧 우리가 민주주의로 인식해온 서구의 기존 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책의 주제로 이어진다.

토드의 진단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르코지의 집권과 같은 일시적이고 정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인류학적이고 사회 심층적이며 구조적인 변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몰락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를 들자면, MB 정권이 출현했다는 사실보다도, 그러한 보수 정권을 출현시키게 만든 대중의 의식과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구조의 심부에 있는 변화가 더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다.

독자들 찬사와 논란 이어져

충격적인 테마를 다룬 탓인지, 출간된 지 4개월 정도 밖에 안됐지만, 책에 대한 프랑스 독자들의 반향은 뜨겁다. 프랑스 독자 중의 한 명인 뒤께스느와이 씨는 아마존 프랑스의 독자평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함에 있어 비관습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책”이라고 언급하면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나타난 성찰의 부록으로 기입될만하다”고 평하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다. 또 리챠드 아페이안 씨는 “사건들을 새로운 빛으로 해명해주고,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이상 기성 미디어와 정당의 바보 같은 이야기를 참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러한 참을 수 없음은 고통스러울 것이므로, 이 책을 읽지 말 것”을 역설적으로 권했다.

파리에 거주하는 리티티라는 닉네임의 독자는 “특히 가족모델과 정치모델 사이의 관계를 국가 혹은 지역의 범위에서 설명하는 역사적 분석을 높게 평가한다”면서 “가능한 해결책을 심화시킬 다른 저작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또 발마에 거주하는 장 마리 필로씨는 조금 색다른 평을 내놓았다. 그는 “저작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공존하는데, 낙관주의적 시나리오는 유럽 보호주의의 조숙”을 촉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 필로씨는 “현재의 지배적인 관점과 배치되는 것이고, 드문 관점”이라고 지적하면서 “향후 경제적, 환경적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건설적인 토론이 심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책은 여러 토론 및 서평 사이트에서도 화제가 됐다. 시사 토론 사이트 중 하나인 지평선에서는 수 십 명의 네티즌들이 책의 논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과녁의 심장’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은 종교에 대한 토드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엠마뉘엘 수녀는 종교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선에 대한 갈망이 지금처럼 강한 적도 없었다”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말라킨느라는 네티즌은 “이슬람 혐오증의 증가는 종교적 공백의 징후”라면서 “가톨릭의 붕괴는 거대한 지표의 상실을 야기한 바, 이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적을 스스로 발명하고자 함에 이른다”고 응수했다. 특히 이는 이민자 수나, 이슬람의 종교 행위가 저하된 시점에서 오히려 인종, 종교적 적대주의가 부상하는 현상을 설명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필립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도 토드의 주장에 수긍하면서 “우리는 사르코지 및 정부 관료의 문화적 결핍을 겪고 있다. 그들에게 휴머니즘은 없다”고 코멘트 하는 등,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적 보호주의 등 토드가 제기한 다양한 테제가 논의됐다.

또 다른 저명 토론 사이트인 ‘아고라-시민의 미디어’에서는 34년 간 고전 문학 교사로 활동했고, 인권 옹호 협회의 회장인 폴 빌라쉬 씨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엠마뉘엘 토드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심층 서평을 게재했다. 이 서평에서 빌라쉬 씨는 “이 책은 미래의 최악을 시사한다”면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토드에게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의 징후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예로 그는 토드의 책으로부터 사르코지와 그를 선출한 사회의 5가지 결점을 읽어낸다.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에 의한 사고의 뒤죽박죽 △지적인 핍진함 △비시민의 배제로 표현되는 공격성 △돈에 대한 사랑 △정서적이고 가족적인 불안정성 등이 그것이다.

토드의 책이 일으키는 이러한 반향은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연구에 충실하면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앙가주망을 지향하면 학문적 공력 쌓기에 소홀한 국내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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