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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를 바탕으로 한 자립형 경제는 가능한가
절제를 바탕으로 한 자립형 경제는 가능한가
  • 고민창 원광대 전임강사·경제학
  • 승인 2009.03.2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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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홍기빈 지음┃책세상│2008│200쪽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홍기빈 지음┃책세상│2008│200쪽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을 돌아봄으로써 현대 경제가 의거하고 있는 논리의 근간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 경제의 특질은 시장 경제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수출주도형이라는 점에 있다. 국민을 닦달하는 수출주도형 경제의 폐해를 인식한 저자는 아리스텔레스의 절제와 자립의 경제 사상을 강조한다.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보자. “시장경제 하에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존재적 안정성을 위해 밤낮으로 돈벌이에 골몰하므로 폴리스적인 생활이나 행복한 삶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좀 더 안정성이 높은 호혜적 선물 등의 자연적 교역으로 시장경제를 대체하고자 했던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였던 것이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홍기빈 박사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에 의존해 현대의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비판함과 동시에 경제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려는 야심찬 목적 하에 쓰인 책이다. 이 책은 성격 규정이 어려운 책이다.
경제학설사 책이라고 보기에는 전문성이 다소 부족하고, 단순한 교양도서라고 보기에는 경제학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이 거슬린다. 굳이 분류한다면 비판적 교양도서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총 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공리, 즉 희소성과 선택의 공리에 대한 일관된 비판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제1장과 제2장은 경제(학)라는 개념의 현재적 상식, 즉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경제(학)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희소하기 때문에 경제학은 선택에 관한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신고전학파의 경제학 정의에 대해 홍기빈 박사는 희소한 것은 권력일 뿐 물질적 재화가 아니며, 권력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물질적 부에 의해 충족되지 않는 사회(예를 들어 신분사회)에서 신고전학파의 경제학 정의는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을 통해 현대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경제(학) 개념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생에서 최상의 좋음이란 행복한 삶이며, 행복한 삶이란 인간 이성을 발휘해 할 수 있는 모든 인간 활동에 도전하는 것, 그리해 자신 속에 잠재돼 있는 인간 이성을 모두 끄집어내어 풍부하게 발전시키고 꽃피우는 것이다. 최상의 좋음으로서 행복한 삶은 인간 활동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어떠한 것에도 제한받지 않는 무한한 성격을 갖는 반면, 이를 충족시킬 수단으로서 재화의 취득은 목적에 의해 규정되며 목적에 부합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행복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재화의 양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주장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희소성의 공리를 반박한다. 제5장은 근대사상과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어떻게 방법론적 개인주의와 희소성의 공리를 추구하게 됐는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제6장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비판적인 경제학자들의 경제학 방법론과 비전을 짤막하게 논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희소성과 선택의 공리를 비판하고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 구성을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돌아가서 영감을 구하고자 했지만 큰 성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늘 정치적 이상형으로 간주했던 폴리스가 오늘날의 글로벌 경제에서 얼마나 현실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도 그렇고,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행복한 삶을 위한 절제의 미학에 대한 강조가 오늘날 역사의 종말이 회자되는 滿開한 전 지구적 시장경제의 상황에서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를 생각할 때도 그렇다.

 

안타깝게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욕망의 과잉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은 결코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해봐야 공허한 메아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경험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머리는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혜에 동의하면서도 시장경제에 포섭된 우리의 몸은 물질적 욕망의 늪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비판적 지성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아니라 시장을 규제할 구체적 제도개혁 방안에 대한 논의와 실천일 것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희소성과 선택의 공리가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도 개별과학의 발전을 통합함으로써 성공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 예 중의 하나가 보건경제학과 조직심리학 발전과 여기서 사용된 기본욕구(needs)와 욕망(wants)의 구별이다. 기본욕구는 개인의 독립, 생존, 사회적 활동을 위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필수조건인 반면, 욕망은 문화적으로 규정된 개인의 주관적인 열망이다. 건강(혹은 건강한 삶)과 보건의료는 개인의 선호와는 독립적인 인간의 보편적  기본욕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개인의 무한한 욕망과 희소한 자원에 대한 선택의 학문으로 경제학을 정의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보건의료부문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현재 보건의료부문은 경제에서 점점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보건의료부문의 비중은 총생산의 16%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보건의료부문에서 신고전학파의 경제학 정의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면, 그 정의의 보편성은 심각하게 훼손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보건의료에 대한 기본욕구는 비자발적 성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질병에 걸리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없으며, 유전적 요인에 의한 질병과 사고에 의한 보건의료의 기본욕구도 개인의 선택권 밖에 있다. 따라서 보건의료에 대한 기본욕구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핵심인 자발적 선택과 충돌한다.
기본욕구와 욕망의 구별은 최근 영리의료법인 허용과 관련된 논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부 보건의료(예를 들어 성형)가 욕망의 성격을 가질지라도 대부분의 보건의료는 기본욕구의 성격을 갖는다. 기본욕구로서 보건의료서비스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것을 요구받는다.
영리의료법인이 발달한 미국의 경험은 인간의 보편적인 기본욕구로서 보건의료를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인간 삶에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일독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제사상과 경제사상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재기 넘치는 언어 구사, 과거의 경제사상이 어떻게 현재의 경제상황과 관련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할 또 다른 이유이다.

 

고민창 원광대 전임강사·경제학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부의 통화정책과 케임브리지방정식」등의 논문과 『동아시아 금융협력체 구상』등의 저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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