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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 남북한 공동연구 끝낸 이현복 교수
[지면으로의 초대] : 남북한 공동연구 끝낸 이현복 교수
  • 교수신문
  • 승인 2002.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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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26 10:00:50
평생 한글의 개발과 보급에 앞장서온 이현복 서울대 교수(언어학)가 최초의 남북 공동 연구서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교수가 남북언어 비교연구를 시작한 것은 91년.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북한의 로길룡 혜산사범대학 교수(언어학)와 함께 한국어를 강의하면서부터다. 남북언어 비교가 “나라안팎에서의 우리말과 글의 교육과 연구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조국통일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 남과 북의 두 교수는 로교수가 귀국할 때까지 함께 작업했다. 로 교수는 북한으로 돌아간 후 연락이 두절됐고, 이 교수는 공동작업 기회를 기다리며 단독 연구를 계속했다. 비록 북한과 함께 출판하지 못하지만, “공동연구가 완성되면 그 결과를 공동명의로 출판한다”는 합의서 내용을 지킬 예정이다. 애초에 2년으로 계획된 연구가 10년만에 빛을 보게된 것에서도 그간의 한반도 사정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

북한의 자주적 언어정책 높이 평가
저자가 밝히는 본서의 한 가지 의의는 ‘남북언어 표준화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실제적인 방안으로 ‘남북언어 표준화 공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이 교수가 생각하는 언어의 표준화란 단순한 남한 언어의 제도화는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는 한자어와 외래어를 토박이말로 바꾸는 ‘말 다듬기 운동’이나 일관성 있는 한글전용 등 북한의 자주적인 언어정책을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서울과 평양의 발음의 표준화 문제나 언어를 ‘혁명의 무기’로 보는 북한의 언어관 문제 등 난제들은 산적해 있다. 그러나 언어문제는 필연적으로 돌출될 것이고, 이에 대한 합리적 해결을 포기하고 권력의 자의적 결정이나 시장의 방임논리를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판단에 동의한다면, 남북공동의 조정기구와 규제원리가 필요하다는 이 교수의 신념에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가 줄기차게 정부의 언어정책을 비판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를 들어, 이 교수에 따르면 80년대 군부가 로마자 표기법을 개악한 것은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비전문적 졸속행정이 결합된 전형적인 정책 오류였다. 게다가 이 교수가 들려주는 일화를 들어보면, 군부가 주장했던 미국식 표기법이 과연 미국인의 이해에 더 도움이 되는지 의심해 보게 된다. “한국전쟁 때 한 미군 조종사가 평안도 정주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군사지도에 나와 있는 ‘Chongju’와 ‘Ch’ongju’를 혼동하고 충청북도 청주를 폭격했다.” 음성학을 전공한 이현복 교수의 연구 업적에서 ‘국제한글음성문자’(International Korean Phonetic Alphabet) 창안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교수는 작년 여름 태국 원주민 라후족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데 성공함으로써, 말은 있되 글이 없는 문맹부족에게 문자를 보급하는 한편으로 한글문자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라후족을 비롯한 동남아 고산족은 외모와 언어와 풍습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여 한글 교육이 수월할 뿐 아니라 쉽게 친근감을 느낀다고.
이들 오지인의 가난과 무지를 가슴아파하는 이 교수는 라후족에게 한국 유학 기회를 제공하여 한글 교사를 양성하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며 즐거워한다. 한편, 그가 결성한 ‘남방문화연구회’는 동남아 일부 부족이 고구려유민의 후손일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지역학의 한 가지 가능성을 엿보게 해준다.
이렇듯 한글 보급에 힘써온 그가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인기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나 스포츠 영웅 데이먼 힐 같은 인물이 받았던 CBA 훈장을 받은 것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런던대학에서 수학한 그가 정통 영국식 영어를 발음교육의 기초로 삼은 것이나 영국영어 구사가 필요한 집단이 있음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내가 영어를 위해 일한 것은 한글을 위해 일한 것에 비하면 1/10도 안 된다.” 이 교수는 같은 해에 세종문화상을 수상했다.

퇴직을 기다리는 ‘진짜’ 이유
이 교수는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한가해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국제한글음성문자’의 국내 활용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 교수가 갈 곳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발음교육과 언어치료에서부터 방송자문과 음정감정까지 그의 연구결과가 활용되는 범위는 대단히 넓다. 그러나 ‘1인 7역’이라는 주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 자신은 ‘아직 할 일의 60%밖에 못 한 것 같다’며 식지 않는 의욕을 보여준다. 지금은 사전의 발음기호에 로마자와 한글음성문자를 병기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고, 한국어 표준발음사전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일반인 대상의 사이버 강의를 개설하여 국어와 영어의 표준발음을 교육하고 보급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퇴직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라후족과 비슷한 처지의 부족들을 찾아다니며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들의 의사소통을 수월하게 해주고, 그들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할 도구를 선물하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 동안 영국, 스웨덴, 미국 등 서구 잘 사는 나라에서 공부하고 가르쳐 왔다. 이제부터는 내가 없어도 되는 곳이 아닌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곳은 사람들도 순박하고, 날씨도 따뜻하다.”
김정아 객원기자 anonio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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