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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루덴스] : 벼루와 함께 한 조병수 교수의 30년
[호모루덴스] : 벼루와 함께 한 조병수 교수의 30년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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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26 09:56:34

돌가루를 빻아 만든 징니연, 도자기처럼 구워 만든 도자연, 평평한 돌을 깎거나 무늬를 넣지 않고 그대로 만든 평연, 청동으로 만든 동연, 옥으로 만든 옥연, 나무로 만든 목연…. 이들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벼루(硯) 만드는 법과 재질에 따른 이름들이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공부벗 가운데 으뜸으로 삼았다는 벼루는 그 漢字의 모임부터가 기가 막히다. ‘돌(石)을 본다(見)’니, 이 얼마나 운치 있는 발상인가. 주위를 압도하는 묵직함, 오랠수록 은은히 배는 향기에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진중함까지, 선비들이 닮고 싶어하는 성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벼루는 그래서 애장품 1호로 간직되어 왔으리라.

조병수 경기대 교수(건축대학원)는 그런 벼루를 한 두 점도 아니고 자그마치 5백여 점 넘게 모은, 대한민국 대표 벼루 수집가이다. 중국 당나라 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가진 벼루들은 조교수에게 단순한 문방구가 아니라 예술품 그 자체이다. 30년을 이은 인연의 시작은 6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에 가보처럼 내려오던 벼루를 빌려간 동네 일가 어른의 집에 불이 나면서 벼루 또한 사라져버린 짧은 사건이었지만 벼루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었던 듯, 어른이 되어 전시장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벼루 한 점이 그를 이끌었다.

“벼루에는 돌이 갖고 있는 천연의 질감, 한 편의 추상화 같은 색깔과 무늬에 더해 그것을 만들어낸 장인의 혼과 열정, 벼루를 갈고 닦으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 선비의 정신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그렇게 어우러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그의 예찬만큼 벼루 5백여 점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용들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느라 하늘이 시끄럽고, 연꽃 잎새로 고개 내민 물고기의 비늘과 일렁이는 물결이 생생하다. 벼루들은 그렇게 무늬가 다르고 이름도 다 다르다.

그의 벼루들이 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단계석’이기 때문이다.

“중국 단계지방에서 나는 돌을 벼루 만드는 데 최고로 칩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단계 벼루 하나만 있으면 부러울 것 없다고 했지요. 추사 김정희 선생은 ‘십만의 돈꿰미는 몸에 감아도 한 조각의 단계석은 얻기 어렵다’는 시구까지 남길 정도였으니까요.”‘벼루의 왕’이라 불릴만큼 돌의 질이 뛰어나고 천연의 빛과 무늬가 아름다운 단계석이 조교수의 벼루 가운데 95%를 차지한다. 좋은 벼루 났다는 소문만 들리면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까지 찾아간 열정의 산물인 셈이다. 그의 꿈은 고향인 충남 예산에 벼루박물관을 짓는 것. 부지 선정과 설계도까지 이미 끝마쳤다. 어린아이들이 박물관에 찾아와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벼루에 탄성을 지르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그는 6년 남은 정년을 기다리고 있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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