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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치 선명 … 유기적 지식인 양성에 발목잡힌 것은?
활동 기치 선명 … 유기적 지식인 양성에 발목잡힌 것은?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16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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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대중화 현장을 찾아서]2. 사회과학편

80년대 학내 지하서클이 담당했던 역할은 작지 않았다. 권력의 이데올로그이거나 방관자에 머물던 강단을 대신해 사회 비판적이고 전복적인 지식의 형성과 교류의 장으로서 기능을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특히 중시됐던 분야는 단연 사회과학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필두로 숱한 反자본주의 이론들이 논의됐고, 나름의 성과도 냈다.

허나 동구권의 몰락과 정권 교체, 시대의 이러저러한 변화와 함께 지하서클은 사라졌다. 혹자는 그 빈 공백을 대학 외부의 인문학 공동체들이 메우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현재 대학 외부의 인문학 공동체들은 다소간 지식의 유희에 초점을 맞춘 측면이 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90년대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를 강타한 소위 ‘포스트’ 바람에서 찾기도 한다.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몰락, 개인의 삶과 욕망에 대한 권리가 강조되는 가운데, 정작 중요한 것들이 간과됐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빈부격차, 실업과 비정규직의 양산, 서민 삶의 피폐화, 산업화-정보화가 야기하는 모순들의 착종, 전쟁, 테러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일부 문제의식을 가진 집단들이 만들어낸 지식 대중화의 흐름이 있다. 인문학 대안 공동체와는 사뭇 다른 사회과학 관련 대안 단체가 그것이다.


 

이들 단체는 유희, 향유, 욕망, 지적쾌락의 대상으로서 지식을 대하지는 않는다. 사회에 대한 어느 정도 분명한 문제의식과 실천적 지향을 갖고 대중을 만난다. 그렇다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치를 내걸고 어떤 식으로 단체를 꾸려가고 있을까.

우선 사회과학아카데미를 보자. 사회과학아카데미는 2003년부터 논의가 진행됐고, 2007년 1학기 때부터 사회과학대학원 준비모임이라는 형태로 공개 세미나를 시작했다.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 8명이 2005년 10월에 발기한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취지문에서 “현 시기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을 양성하고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 건설에 대한 필요성의 제기에 따라 만들어진 공간”으로 자기규정을 하고 있다.


또 단체 설립의 근본 문제의식으로는 △변혁주체의 올바른 형성에 대한 요청 △새로운 사회 건설의 역사적 책무를 담지할 유기적 지식인 양성 △지식상품시장을 벗어난 저항문화 생산지에 대한 요구 △진보학문의 근거지의 필요성 등 9가지를 들고 있다. 취지문에서 드러나듯이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문화, 대항지식의 근거지로서 기능을 자임하고 있으며,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지식인들의 양성이라는 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이는 이들의 커리큘럼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009년 봄학기의 강좌들을 보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 과정’,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눈뜨기’, ‘주류경제학 비판’, ‘21세기 자본론 읽어내기’, ‘혁명의 역사’등 색깔이 분명한 강좌들이 주를 이룬다.

이론의 과학성과 급진적인 색채

사회과학아카데미 외에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있다. 노동운동을 하던 몇몇 활동가가 결성한 이 단체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운동에는 여러 분열·대립이 존재하고, 그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정치적·조직적 통일과 단결을 달성하는 것”을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그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론의 과학성에 엄격할 것이며, 구체적인 정세와 객관적인 조건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유물 변증법적이고 사적유물론적인 역사·사회과학을 탐구하고 보급할 것”이라며 기치를 내걸고 있다. 80년대의 비합법 정치 조직의 발기문과 같은 소개문이 보여주듯, 이들은 보다 분명하고, 급진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 커리큘럼에도 이는 잘 드러나는데, ‘자본론 읽기’,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읽기’, ‘현장 활동론 세미나’, ‘노동자 교양경제학 읽기’, ‘레닌 저작 읽기’등 80년대 지하 서클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게 구성이 돼 있다.

다소 규모가 있는 단체로는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이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를 넘어 인간해방으로 전진하는 참 노동운동의 일꾼들을 키워내는 것”을 취지로 삼는 이곳은 2000년 12월에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한 가운데 개교를 했다. 원격 대학 설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이버 노동대학은 다른 단체와 달리 대학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입학, 수강, 졸업 등의 학사 과정이 있으며, 3년 과정의 단계적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있다. 각종 토론과 리포트 제출 등 수강생들에게 일종의 ‘의무’도 부과함으로써 적극적인 학습도 유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이버 노동대학의 행정실장인 이용희씨는 “다른 단체와 달리 일종의 대학이기 때문에 수강생들과 좀 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가져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많은 졸업생들이 체계적으로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현장에서 나름의 몫을 하고 있다”며 자부심을 표했다.

 전투적이고 진지한 이들 단체의 면면은 분명 이들만의 강점이다. 강단은 논문 업적에만 몰두하고, 인문학 단체들은 지적 유희에 빠진 형국에서,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부하려는 지성 집단이 있다는 것이 가진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전투성이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례로 한 대학 교수는 “이미 이론적 내공이 다한 사상에 집착하면서, 새로운 대안 지식의 창출에는 다소 무관심하다”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

새로운 지식 창출에는 못 미쳐

이러한 한계의 원인으로는 새로운 사상 대안 창출을 위해 필요한 광범위한 분야에 대한 폭넓고 개방적인 접근 부재가 꼽힌다. 오늘의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는 마르크스와 레닌, 혹은 정치경제학 개론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비판적 사회과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 공학의 성과와 인문학적 성찰 거기에 세계 곳곳에서 일고 있는 대안 실험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전투적이고 (노동현장에 대해) 유기적인 지식인을 양성한다는 기치도 대중의 접근성을 막는다는 지적이 있다. 사회 모순의 체감은 노동 현장만이 아니라, 환경이 오염된 현장, 여성이 차별받고 있는 현장,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현장 등 다양한 곳에도 존재한다. 우리의 삶을 괴롭게 하는 현실이라는 괴물이 그만큼 복잡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유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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