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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희생하면 다음 학과장도 날 배려할테지…”
“혼자 희생하면 다음 학과장도 날 배려할테지…”
  • 김유정 기자
  • 승인 2009.03.16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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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평가 강화, 달라진 교수사회_ ② ‘논문 최다’ 물리·화학과장이 사는 법

학과업무를 책임지는 최기항 고려대 교수(화학과 BK21사업단 부단장)의 달력엔 학과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일일이 기억할 수 없어 적어놓은’ 학과일은 거의 매일이다. “입시문제 출제·채점, 학부·대학원생 오리엔테이션, 공공 연구기기 관리, 교환학생 면접, 신임교원 오리엔테이션 등이 최근에 한 일이에요. 주변 환경에 상관없이 내 갈 길만 가겠다고 고집하지 않는 한 교수들은 논문 위주의 업적평가 기준을 무시 못 합니다. 그러다보니 연구결과를 내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안배해요. 학과업무를 골고루 나눠드리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대학에서 논문을 가장 많이 쓰는 학과를 꼽을 때 물리학과, 화학과는 빠지지 않는다. 연구논문 위주의 교수업적평가 강화 움직임은 두 학과에 분명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학과 교수들이 그만큼 논문 쓰기에 ‘올인’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자연스레 학과일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학과장이 모든 일을 도맡다시피 한다. 논문을 많이 발표하는 학과지만 논문중심 평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른 전공교수들과 같다. 학과장들은 “학과 교수들이 쓰는 논문 전부 질이 좋을까”라고 의문을 표시한다. 물리·화학과 학과장들의 고민과 이들이 내놓는 업적평가 개선안은 무엇일까.

“학과장이 학과일을 혼자 처리한다고 보면 된다. 우리 학과는 전공교수들이 돌아가면서 학과장을 맡는데, 이 기간에는 그냥 ‘혼자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ㅇ대 물리학과장이 전하는 학과풍경은 씁쓸하다. 동교 교수들이 논문 쓰느라 바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참여를 요청하기보다 알아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고.

ㅂ대 화학과장은 “연구, 강의에 지장을 줄 정도로 학과업무가 한꺼번에 몰리는 때가 있지만 , 다른 교수들이 잡무에 시간을 뺏기지 않게 배려한다. 그러면 나중에 학과장을 맡은 교수도 날 배려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연구실적 쌓기에 급급해 강의준비를 소홀히 한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학과일에 대한 무관심도 예외가 아니다. 교수와 학생들이 강의시간 외에 교류할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ㅈ대 물리학과장은 자신의 경험을 토로했다. “학과소개 자료를 잘 만들기가 어려워서 교수들의 도움을 얻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은 학생들과 MT를 가는데 같이 가겠다는 선생님이 안 계시더라. MT는 학생들과 친분을 쌓고 이들을 지도할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다. 학과 현상유지에도 벅찬 게 사실이다.”

학과장들은 논문편수 중심의 업적평가가 물리·화학과 교수들에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논문’을 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논문’을 쓰느냐를 물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최기항 고려대 교수는 “계량화된 수치를 사용하는 평가가 가장 공정하다는 인식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연구성과를 많이 낸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연구를 한다는 것 아닌가. 학문분야마다 성격이 다른데 공통 평가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홍진표 한양대 물리학과장은 “물리학과는 천체부터 나노분야까지 매우 다양하다. 일률적으로 물리학과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명원 충북대 물리학과장 역시 “논문 숫자를 너무 따지다 보니 질 낮은 논문이 나오는 일이 있다. 새로운 논문이라고 하지만 어제, 오늘 봤던 내용과 다를 게 없다”고 꼬집었다. “쇠에 구리를 2%, 3%씩 섞어 합금에 대한 성질을 연구하는 내용이 논문 한 편에 담겨야 하는데, 똑같은 장비로 말만 다르게 해서 구리를 2%, 3%씩 섞을 때마다 새 논문을 낸다는 게 말이 되나. 문제는 그런 식으로 1년에 10편을 써내도 이것을 연구실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업적평가 개선안에는 연구와 교육평가 비중을 다양하게 마련하는 한편 연구평가에서 전공별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빠지지 않는다. 물리·화학과장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특히 물리, 화학이 이공계 기초교육 필수과목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홍인 경북대 화학과장은 “물리·화학은 이공계 전공기초과목이기 때문에 교양과목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공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점을 고쳐야 한다”고 전했다. 질 좋은 논문을 평가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일도 시급하는 지적이다. 강기천 전남대 물리학과장은 “단순 계량화에서 벗어나 피어리뷰, 해외학자 평가를 포함하거나 정량평가에서 임팩트 팩터, 피인용 횟수 등에 대한 평가를 추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유정 기자 je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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