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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 학회 논문 심사 유감 ]익명의 권력이 두려운 이유
[기고_ 학회 논문 심사 유감 ]익명의 권력이 두려운 이유
  • 주명철 한국교원대·역사교육학
  • 승인 2009.03.09 15: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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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겪었다. 내가 지난 1년 이상 공부하고 공들여 쓴 논문을 1월 초에 한국서양사학회의 『서양사론』에 실어달라고 투고했다. 그리고 2월 23일 심사결과를 통보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두 분이 심사한 뒤 각각 C와 D를 주고, 전면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글이므로 ‘게재불가’라고 판정했다.

나는 내 글이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완벽하게 내 뜻을 전달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혹시 누구라도 ‘이렇게 하면 더 낫지 않겠는가’ 라는 식으로 충고하면 충분히 그 의미를 알고, 설사 내 표현이 더 좋다 하더라도 지적받은 부분을 남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고치려 노력했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두 사람 모두에게 의사소통 불가 판정을 받다니!

나는 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두 사람은 내 글을 심사하는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음에도 입을 맞춘 듯이 ‘게재불가’ 판정을 낸 것을 어떻게든 납득하려 노력했다. 나로서는 내 글에 정말 문제가 있거나 읽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흔히 정치가들이 거짓말하듯 ‘겸허히’, 내 글에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납득할 만한 근거를 마련하는 편이 남을 탓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현행 제도에는 내 글을 다시 읽어달라고 재심을 청구할 근거가 없고, 학회도 그럴 의무가 없는데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그 글을 영문으로 번역해, 미국(UC Urvine)에 있는 교수에게 논평해달라고 부탁했고, 그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받았다.

“학회 발표용인지, 출판용인지 밝히지 않은 글을 읽었는데, 한두 가지 책을 더 추가하면 좋겠다, 이 주제를 다룬 연구는 아직 없으며, 영어 표현을 좀 더 세련되게 고쳐서 발표하라.” 이해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취지였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하는 학자, 그러므로 내 글을 심사할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서툰 영어로 옮겨서 보냈는데도, 그 분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평하고, 조금 손질하면 좋겠다고 말해줌으로써 내 글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임을 증명해주었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내 글을 형편없는 것처럼 평한 분보다는 미국의 학자를 더 믿는 근거는 역시 그 분의 업적을 인정해서다. 그 분은 프랑스 혁명사 분야에서 비록 혼자 글을 쓰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분야 연구자 전체가 생산한 업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발표하고, 더 훌륭한 저술과 논문으로 두루 인정받는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을 영어로 옮기는 동안, ‘왜 내 글이 거부당했을까’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봤다. 우선 학파와 학문수준의 문제로 나눠서 접근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프랑스 혁명사 연구자들이 학파를 이룰 만큼 활발한가. 분명히 나는 그들과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엇보다도 틈만 나면 “우리나라의 프랑스 혁명사 연구가 발전하려면 일본에서 만든 낱말을 슬쩍 가져다 쓰는 차원에서 벗어나 정확한 개념을 우리 힘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이번 논문에서도 주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

예를 들어, ‘공안위원회’는 일본이 번역해 한자로 표기한 것을 우리 음으로 읽은 말이지 번역이 아니다. 나는 ‘공안’도 좋지만 혁명의 과정에서 ‘나라구하기(구국)’라는 개념이 더 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원어로 Salut public(영어로 Public Safety)은 모두 종교적 ‘구원’의 개념을 세속국가의 개념과 합쳐 만든 것이므로 ‘구국위원회’가 적확하다고 주장했다. 영어로 Safety를 ‘안전’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구원투수’라는 말이 있듯이, 나라를 구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국민공회에서 의원들이 ‘공적인 것(chose publique, res publica, 공화국)을 구하자’고 쓰던 용례다.

이 같은 제안이 마음에 안들 수 있다. 지금까지 잘 쓰던 낱말을 마구 고치자고 제안하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반론으로 맞서야 하지 않겠는가. 양심적인 학자라면 의견이 다르다고 원천봉쇄 하기보다, 소명의 기회를 주고 나서 자기 말을 할 기회를 찾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가.

지금까지 학진에 연구비를 신청하다가 탈락한 경우, 그것은 ‘떡 나누기’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그 떡을 먹지 못하면 누군가 먹겠지’ 하고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검증할 자세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내 논문을 읽고, 건설적인 방향에서 이러저런 식으로 보완해 달라고 주문을 한다면 모를까, 전면재검토를 말하면서 원천봉쇄 한다면 그 피해는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이 기회를 빌려, 익명성을 보장받고 권력을 휘두르는 심사 제도를 보완할 장치를 제안한다. 우리 속담에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선무당이 학계에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막는 장치가 필요하다.

주명철 한국교원대·역사교육학

필자는 파리 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등의 저서와 「서양의 문화사 연구 방법론」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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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2009-03-10 11:45:44
예전에도 교수신문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었는데요. peer review 시스템이란게 이런 저런 약점을 가지고서도 그럭저럭 굴러가야만 하는 거죠. 익명성을 보장받고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도 알고보면 자신의 바쁜 시간 쪼개어 귀찮은 일 하는 거 아닌가요? 보완 장치가 생겨서 자꾸 더 귀찮아지면 누가 심사를 하려고 하겠어요? 돈도 안생기고 있어도 쥐꼬리만큼 생기는데요.

기사 쓰신 교수님 논문을 안읽어봐서 구체적 얘기를 할 수가 없고 또 공정한 심사였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는데요. 이 기사만 봐서는 무엇이 불만스러운 것인지 아주 혼란스럽습니다. (죄송하지만 아주 잘 쓰여진 기사는 아닙니다.) 왜 게재불가 판정을 받았는지에 대한 전달력이 좀 아쉽네요. 소통의 문제 때문에 게재불가였나요? 전체적인 논문의 질 때문인가요? 번역의 문제에 대해 상대를 설득하지 못해서 였나요?

외국교수와의 교신도 외국교수는 그런 식의 답장에 나쁜 내용을 담을 리가 없죠(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논문으로 저널 논문 심사를 하게 된다면 엄청나게 더 비판적이 될 겁니다). 외국 교수가 나름 낑낑대며 영어로 옮긴 티가 나는데(혹 교정 서비스라도 이용하셨는지요...) 노력을 가상하게 봐서라도 덕담이라도 한 마디 더 해주고 싶은게 보통의 경우죠. 이걸 근거로 심사가 엉터리였다고 말하시는 건 제가 볼 때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기사 내용만으로 판단할 때요.)

제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기사에 나온 내용만으로는 이런 저런 사정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