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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 혹은 새로운 정치적 전망의 가능성
감수성 혹은 새로운 정치적 전망의 가능성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09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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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봄호 리뷰

주요 계간지 편집진들이 던졌을 법할 질문은 무엇으로 시작했을까. 아마도 ‘어디’였을 것이다. 촛불이 잠잠해지니 경제위기가, 경제위기가 만성화되니 미네르바가, 용산참사가, 이어서 언론악법이… 거기에 사이코패스들까지 출몰을 하니, 질문을 던지는 심정은 절박하고 다급했을 터. 여기서 ‘어디’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서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으로서 의미이다. 바로 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2009년 봄 계간지들을 살펴보자.

 

비밀을 간직한 자들의 연대에 대한 물음

<창작과 비평>(통권 143호)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어디로’라는 특집을 마련했다. 브루스 커밍스와 백낙청 두 거물이 ‘전지구적 경제위기 속의 한국과 동아시아’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눴고, 임원혁 KDI 경제개발협력실장이 ‘신자유주의, 정말 끝났는가’와 같은 논문을 실었다.

특히 커밍스와 백낙청은 대담을 통해 신자유주의 몰락이라는 일련의 코드로 한국 사회의 어제, 오늘, 내일을 진단했다. 커밍스는 마르크스와 폴라니를 다시 읽는다고 밝히면서, “시장 자체가 왜 통제돼야 하는가를 말해준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마르크스가 “오늘날 전지구적 맥락에 놓인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커졌다”는 점에 동의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를 다시 읽자는 구호야 이미 수십 년 전 알튀세르가 외쳤던 구호 아닌가. 이 대목에서 커밍스는 “사회주의와 소련의 붕괴는, 어떤 진보적 해법이 있다고 믿었던 우리에게는 타격이었다. 그것이 많은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면서 고민을 드러냈다. 이에 백낙청은 라틴 아메리카의 지역운동 등에 기대감을 피력하면서 “그것이 사회민주주의의 한 변종이 될지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일지 궁금하기도 하다”고 응수했다.

‘마르크스적인 대안이 요구되기는 하는데, 이미 그 한계를 체험한 불신이 상존한다. 조심스레 제3세계 지역운동 등 실제 사례에서 활로를 모색하자’는 취지다.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될 전략인 점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내용과 힘있는 호소력이 아쉽다. 두 거장의 이후 작업에 기대를 걸어본다.

<문학과 사회>(통권 85호)는 지난 호에 이어 ‘미래의 작가들 2’를 특집으로 마련했다. ‘한국 소설의 현재와 미래’라는 좌담을 애써 준비한 모습이 다소 나이브해 보인다면, 특별기고에 주목해 볼 만하다. 요즘 국내에서 뜨고 있는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 인터뷰’에 지면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문학과 정치 관련 대목이다. 곧 참여문학이냐 순수문학이냐라는 조야한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부단히 노력한다는 점에 랑시에르의 고유함이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말한다. “저에게 문학은 무엇보다 문학성의 문제를 경유한 것이었죠. 이것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문학이 세계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이 사물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결국 탈정체화, 즉 주체화의 형태, 해방 가능성,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어떤 것’을 느끼게 하는 떨림. 공허한 추상명사, 밋밋한 보통명사, 야박한 시선만이 가득한 세상이, 독특한 존재들로 가득참을 느끼는데서 오는 전율. 시 한편을 통해 이 떨림과 전율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랑시에르에 동의할 수 있으리라.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인 것들보다 더 정치적인 호소가 담겨있다는 점까지도.

<문학동네>(통권 58호)는 ‘2009, 문학성의 새로운 구성’이라는 특집을 마련했다. 서영채, 김홍중, 차미령 세 사람의 논문과 심보선, 서동욱, 김행숙 신형철의 좌담이 실렸는데, 좌담에 더 눈길이 간다. 특히 좌담의 제목이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서-오늘날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어서 그럴 것이다. 참석자들과 주제의 설정에서 <문학동네> 특유의 감각성이 드러난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까. 서동욱 서강대 교수는 “사실 시의 정치성이라는 것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데서, 즉 시를 정치적 팸플릿으로 만드는 데서 수립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일 문학의 정치성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자면, 그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새로운 감성적 체험을 가능케 해줄 형식이라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성의 개화가 어떻게 정치적 실천과 사회 변혁으로 이어질까. 이 대목에서 심보선은 “공동체를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드는 공동체, 연대할 수 없는 이들이 만드는 연대”라는 바타이유와 블랑쇼를 연상시키는 제안을 했다.

확고하고 명시적인 소통을 강제하는 체제는 결국 기성의 가치와 관념과 이데올로기와 ‘말’들만을 허용할 뿐이다. 이런 견지에서 심보선의 제안은 결국 “비밀을 어떤 형식을 통해서 바깥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모색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문학의 역설이 어떻게 정치와 연결되는지에 대한 향후의 고민에 관심이 간다.

향후 정세에 대한 우직한 진단

<역사비평>(통권 86권)은 ‘순응과 갈등의 한미관계 60년, 미래지향의 대안을 찾아’를 특집으로 마련했다. 이승만에서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역대 정권과 미국의 관계, 대북문제 등을 각각의 논문을 통해 다루고 있다. 이 중에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기고한 ‘순응과 도전, 적응과 저항-미국의 범위와 한미관계 총설’이 주목할만하다. 미국의 범위(American Boundary)란 “미국이 한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의 상한과 하한을 말한다.” 박 교수는 미국의 범위에 대해 “미국의 대한정책은 민중적, 진보적 개혁조치를 취하더라도 미국의 허용치를 넘어 한국의 좌파나 북한의 요구에 접근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반면 반공주의 또는 권위주의 통치를 수용하더라도 급진저항을 유발해 체제붕괴를 초래하거나 파시스트 독재로 제도화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냉전시대의 범위이다. 이명박과 오바마가 수장으로 있는 현재 한미관계는 어떤 범위에서 진동할까. 박 교수는 이를 두고 “지금 중대국면에 진입해있다. 이 말은 그냥 중요한 시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한미관계 조합의 역사에 비추어보아, 동시에 의제별 정책배열 때문에 한국의 선택 여하에 따라 그러하다는 것이다”고 강조한다. 최근 심상치 않은 남북, 북미 관계와 한미FTA를 고려할 때 그러하다는 이유에서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긴장도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그 외에 권두좌담이 실린 지면에도 손이 간다. ‘위기에 처한 역사교육, 진단과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교육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교수와 교사,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모여서 각자의 관점에서 다양한 측면을 논한다.
마지막으로 <황해문화>에 시선을 옮겨보자. 이번호에서 <황해문화>는 ‘미국발 세계경제위기, 문제와 시각’이라는 특집으로 특유의 저돌성을 보이고 있다. 문우식 서울대 교수가 ‘미국의 국제금융리더십과 달러체제의 운명’에서 차분히 달러 체제에 대해서 분석을 했고, 조복현 한밭대 교수는 ‘미국 금융위기 전개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붕괴’에서 경제위기의 인과적 근원에 신자유주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세계경제위기와 한국경제의 진로 모색’에서 국내의 현황과 진로를 짚어봤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경제 관료 인사 정책을 문제 삼는 부분이 날카롭다. 그 외에 박종현 진주산업대 교수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모델의 종식은 올 것인가 - 위기 인식과 대책 : 영미권’을 통해 미국 경제학자들의 견해를 총괄하고 있다. 경제위기의 근원지에 있는 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귀가 솔깃해지는 대목이다. 이른바 케인스 좌파에 해당하는 교수들의 급진적 관점과 주류 경제학자들의 보수적 시선이 대립하고 있다는 관찰을 보고하고 있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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