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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버틀러 도서관을 배회하던 시절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버틀러 도서관을 배회하던 시절
  • 곽차섭 서평위원 부산대·서양사
  • 승인 2009.03.09 14: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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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니, 때로는 어떤 책과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고까지 생각되는 경우가 있다. 1988년인가 89년인가는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하여튼 그때 나는 컬럼비아 대학의 버틀러 도서관을 배회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16~17세기 유럽 정치사상계에서 마키아벨리가 금서로 묶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그의 사상을 국가이성 개념과 타키투스주의라는 이름하에 널리 논의하고 있었다는 테제의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었고, 그 일환으로 1년간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체류하고 있었다.

볼티모어에 가기 전에 여름 두 달 동안 컬럼비아에서 연수를 받았고 또 대학 가까운 곳에 지인이 있었던 데다가, 뉴욕과 볼티모어 사이는 기차로 몇 시간 안의 거리였으므로, 나는 종종 그곳 도서관에 들리곤 했다. 도서관 폐기 도서를 아주 값싸게 상시로 파는 곳이 있었다는 것도 내가 특히 버틀러 도서관을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말이 폐기도서지 멀쩡한 것도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 갈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둘러보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구상한 학위논문 목차 안에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까지 살았던 뜨라이아노 보깔리니라는 이탈리아 공화주의자 문인이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가 쓴 몇 편의 정치 저작들을 일차사료로 읽어야 했다. 그 중 『빠르나소 통신』은 아폴론이 통치하는 가상의 빠르나소 산정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일화들을 저자가 마치 특파원처럼 보내오는 기발한 형식으로 쓴 책인데, 현대판으로는 이탈리아 역사가 루이지 피르포가 1948년 라테르자 출판사에서 3권으로 엮어낸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 책들을 잘 구할 수가 없었다. 버틀러에서도 찾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제적인 중고서적 판매망이 가동되지 않고 있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볼티모어에서 뉴욕에 온 나는 평소처럼 버틀러에 들러 서가의 ‘신착’ 폐기도서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애타게 찾고 있었던 『빠르나소 통신』 3권짜리 한 질이 떡 하니 꽂혀 있지 않은가. 나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판매대로 가지고 갔다.

내 기억으로 당시 판매가는 하드커버 1달러, 페이퍼백은 50센트였다. 그런데 그때 이탈리아 서적은 대부분 후자였으므로 세 권 값은 다 합해도 총 1달러 50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전율이 일어나곤 한다. 아마 알 만한 사람은 이 기분을 십분 이해할 것이다.

보깔리니와 버틀러가 나와 얽힌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더 구하기 어려운 것이 『타키투스 논고』였다. 이 책은 1677년과 1678년의 古판본만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 정도 오래된 것은 당연히 희귀본 소장실에서만 열람이 가능했다. 언제 그곳에 들어가 그 두꺼운 책을 다 읽는단 말인가.

몇 달은 꼬박 그곳에 출퇴근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두컴컴한 서가를 배회하던 중, 그 저작을 담은 3권짜리 1678년 판본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3백년이 넘은 고서가 그냥 서가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워낙 소장도서가 많은 데다 오랫동안 대출이 되지 않다 보니 이런 경우가 생기는 것 같았다.

문제는 이 귀중한 책들을 어떻게 빌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태까지는 잊혀져 있었지만 막상 책을 빌리려 하면 그 진가를 알아보고 거부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 책을 써큘레이션 데스크로 가지고 갔다. 마침 철없이 보이는 학부 학생이 일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별말 없이 책을 대출해 주었다.

나는 부리나케 그것을 복사했다. 이 고서들은 지금까지도 현대 판본이 나오지 않고 있다.
나는 작년 여름, 다시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과거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들이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서 버틀러로 갔다. 하지만 마침 그때가 일요일이었던지 하필 문을 닫은 통에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그 책들과 그 장소와 그 시간들은 분명히 나와 운명적으로 얽혀 있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곽차섭 서평위원 부산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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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사랑 2010-07-19 00:06:53
잘 읽었습니다. 복사하실 때 책이 상할까 무척 조심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도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들이 꽤 있을 것 같은데...
비슷한 중고서점이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