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4:50 (목)
[신문로세평] ‘카우보이’와 불쌍한 ‘당나귀’
[신문로세평] ‘카우보이’와 불쌍한 ‘당나귀’
  • 교수신문
  • 승인 2002.02.2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2-25 00:00:00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전쟁의 해’ 선포에 이은 ‘악의 축’ 규정으로 세계는 전쟁의 위기와 불안에 떨고 있다. 또한 그 발언의 배경이 부시 행정부 출범 이래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힘의 우위’ 정책과 미사일 방어 체제를 추진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분노와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세상에는 악의 무리가 있고, 미국의 운명은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며, 필요할 경우 이들을 쓸어 버려야한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는 부시의 세계관은 마치 서부극에 등장하는 ‘총잡이 카우보이’를 연상하게 한다. 종횡무진 총을 휘둘러대는 ‘정의의 카우보이’는 도덕적 사명감을 가지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나쁜 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나타나며, 무엇보다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선명하게 흑과 백, 선과 악, 적과 동지를 구분 짓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직 자신만이 선이고 정당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교조주의적인 독단적 자세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들이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편집병적인 태도와 너무도 일치한다.

1859년 ‘자유에 대하여’라는 책을 쓴 근대 자유주의 이론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요청되는 태도는 무엇보다 견해 차이를 조정하고 결합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반 근본주의자이며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의 이런 입장에는 강요가 아닌 타협이라는 윤리적 요구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서부활극의 주인공은 테러에 대한 증오와 보복에만 눈이 멀어, 일방적인 흑백 논리만을 강요하고 있다. 소위 정의의 사도의 주장이 탄압자의 논리로 둔갑한 현실이다.

라 퐁텐느의 ‘페스트에 걸린 아픈 동물들’이라는 우화가 있다. 동물들의 왕국에 페스트가 번져 많은 동물들이 죽게 되자, 동물들은 그 원인이 자신들이 그 동안 저지른 잘못에 대한 하늘의 분노라고 믿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죄인을 찾아 속죄의 희생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먼저 사자를 비롯한 맹수들이 양을 잡아먹었으며, 심지어 양치기까지 해친 사실을 고백했다. 그런데 맹수들은 자신들의 이같은 행위의 책임을 잡아먹힌 힘없는 양이나 양치기에게 전가했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서로 너그럽게 용서할 뿐만 아니라 잘한 일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동물들 중에서 가장 약하고 힘없는 당나귀가 배가 고파서 교회의 뜰에 난 풀을 뜯어먹었다고 고백하자, 맹수들은 이를 용서받지 못할 죄목으로 지목하고, 유죄를 선고하여 처형했다. 결론적으로 작가는 이 우화에서 상대가 강자인가 약자인가에 따라 심판관이 자의적으로 죄의 유무를 판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와 초현대식 무기를 가진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이 기아선상에서 수백만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북한을 두고 대량 살상 무기 운운하며 위협하는 모습은 마치 포악한 사자와 불쌍한 당나귀의 대조처럼 씁쓸하기만 하다.

부시의 방한 하루 전인 18일 광주·전남지역 대학 교수 2백여명이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우방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추진해온 햇볕정책과 남북대화의 가능성을 일시에 물거품”으로 만드는 긴장 조성을 비난하고, “미국의 대북 강경 정책에 편승하는 일부 정치인과 언론의 반민족적 친미 사대주의”를 규탄했다. 상아탑의 지성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에 참담함을 금할 길 없다.

70년대 서독에서는 퍼싱 II형의 중거리 핵 로켓과 크루즈미사일 배치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평화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지만, 결국 미국의 전술핵이 서독지역에 배치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서독 정부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핵무기를 동독을 목표로 겨냥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끌어냈다. 지금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한반도는 핵전쟁의 잠재적인 전투장이다. 우리는 남쪽 최북단인 ‘도라산역’을 방문하고, “북한과의 전쟁 의사가 없다”는 부시의 유화적인 제스처에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80년대 레이건 정부 이래 미 공화당 정권이 추진해온 ‘신냉전체제’는 여전히 유효하며, 더욱이 이는 테러 근절을 구실로 날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염려하는 가운데 남북 신뢰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강대국의 폭풍우를 피할 지혜를 함께 모아야 한다.

신의주행 통일 열차는 ‘도라산역’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기차가 조금 늦게 출발하더라도, 통일에의 긴 여정은 ‘꽃을 먹고 달리는 기관차’처럼 평화로운 기찻길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통일이 비록 늦어 지더라도 이 땅이 다시 자욱한 포연으로 뒤덮여져서는 결코 안된다’는 원칙은 이 시대 우리 민족 모두의 일치된 합의이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