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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미션 임파서블
[문화비평] 미션 임파서블
  • 조영일 문학평론가
  • 승인 2009.03.02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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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글(특히 창비 비판과 관련된)을 발표하고 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조만간 창비에서 청탁이 올 것입니다. 문지나 문동은 그렇지 않지만, 창비는 자기를 비판하는 이들까지 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니까요.” 맞는 말이다. 확실히 창비 만큼은 외부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소위 비주류의 비평가들이 창비에 신뢰를 거두지 못하는(또는 창비에 미련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꾸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당신이 창비를 비판하고서도 창비로부터 청탁을 받았다면, 그것은 어쩌면 창비가 감당할 만한 비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 비판이 그들이 크게 변하기 전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청탁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컨대 ‘진보적 상업주의’라는 비판 정도는 창비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비판한 이들이 창비의 청탁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판까지도 포용하는 제스처와 중화작용을 일으켜 상업주의라는 비판 자체가 저절로 소멸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중동’이 양적으로 한국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면, 한국 대중음악은 SM, YJP, YG가, 한국 문단문학은 창비, 문학과사회, 문학동네 등이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한국 문학계와 한국 대중음악계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생산관리시스템적인 면에서 점점 유사해져가고 있다. 문제는 한국 문단문학에 <한겨레>나 <경향신문>, <시사인>처럼 이념상 그리고 체질상 주류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실천문학>, <세계의문학>, <문학수첩>, <현대문학>, <문학사상> 그리고 최근에 창간된 <자음과모음> 등등의 면모를 일별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들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문학적 당파성)를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곳의 필자들은 모두 창비, 문사, 문동과 공유(교환) 가능하다. 아니, 모두 창비, 문사, 문동에 글을 쓰고 싶어 한다.

다른 곳의 청탁은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더라도 이들의 청탁만큼은 모두들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의 청탁을 거부하는 일, 그것은 어쩌면 문필가들에게 영원히 ‘불가능한 일(Mission Impossible)’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문학이란 1) 문단문학(메인문학), 2) (문단문학에 의해 보통 무시되는) 비문단문학(즉 서브문학)은 물론, 3) 번역문학, 4) 에세이(인문학적 산문)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따라서 나의 관점에서 (문학)비평가는 이 모두를 포괄하면서 넓게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제까지 한국의 비평가들은 1)로 제한된 영역에서 뒹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2), 3), 4)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기울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고, 그 조차도 항상 1)로 수렴됐다. 문학교육시스템의 발전과 더불어 문화의 상징권력이 1)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단문학의 위기’란 그들의 눈에는 한국문학 전체의 위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문단문학이 한국문학의 場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즉 메인문학으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전후)로, 그들이 처음 출현할 당시는 그들 자신이야말로 서브문학이었다(당시 메인문학은 당연 漢文學이었다). 따라서 근대초기에 문단문학이란 엘리트 남성지식인이 일생을 걸만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즉 소설쟁이, 문학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자명한 사실 확인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 문학형태도 자신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지속성을 주장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과 또 그것을 문학일반의 것으로 확대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문단비평가들은 ‘문단문학의 일반화’라는 연금술을 통해 획득한 ‘문학의 영속성’으로 대항하는데, 그것은 사실 자신들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잠시 가장무도회를 벌이는 것으로, 그들이 진정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문학이라기보다는 한국문학에서 문단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도회에 참석할지, 아니면 손 안의 초대장을 찢고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할지는 ‘한국문학’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달려 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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