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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입맛 사로잡은 강좌들 … 강한 ‘색깔’ 藥일까 毒일까
대중 입맛 사로잡은 강좌들 … 강한 ‘색깔’ 藥일까 毒일까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02 16:1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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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대중화의 현장을 찾아서] 인문학편

“사유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모리스 블랑쇼의 말처럼 인문학은 기성의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 본령이 있다. 그런데 강단의 인문학은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의 요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많다. 커리큘럼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방향적인 교육 구조가 특히 문제로 지적이 돼왔다. 80년대에는 학내 지하 서클이 강단이 해내지 못한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하기도 했지만, 제한적이었고 대학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10년 전부터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 등 대안 인문학 단체가 속속 생겨났고, 인지도도 상당히 높아진 상태다. 최근에는 다중 지성의 정원,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정암학당, 마이아카데미(민예총 문예아카데미를 잇는 단체), 이정우 원장의 철학아카데미(한국에는 철학아카데미가 두 군데 있다), 고전 아카데미 등이 문을 열었고, 저소득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관악인문대학도 2006년부터 활동 중이다.

이러한 붐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진 사상적 진공 상태 속에서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이 야기된 배경이 있다. 인터넷 등 매체의 다변화와 활성화로 인해 대중의 지적 수준이 높아진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대안 인문학 단체에 대한 대중의 호응은 기대이상이었다. 대학 강의에 만족하지 못하는 학부생부터, 전문 연구에 몰두하는 대학원생, 가정주부, 직장인, 사업가, 예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단체의 문을 두드렸다.
단체들의 외형적 성장 역시 뚜렷하다. 철학아카데미는 새로운 사옥으로 이전하면서 강의실을 3개로 늘렸다. 수유+ 너머는 상근 회원수만 5~6배가 늘었고, 이래저래 연관을 맺는 대중의 수도 현저하게 증가했다.

이들이 개설한 강좌 제목을 보면, ‘철학 카운셀링’, ‘건축과 철학’, ‘연극과 철학’, ‘글로발: 세계화 시대의 삶권력과 투쟁’, ‘삶정치 : 새로운 삶의 생성’ 등 다채롭고 이색적인 주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 강단에서 덜 환영받았던,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프랑스 철학자들도 이들 단체의 단골 강좌 주제다. 문학, 미술, 건축, 한의학 등에 인문학을 접목시킨 강좌도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 강좌가 대중의 시선을 잡은 데는, 기성 학문이 설정한 경계선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점이 일차적으로 주효했다. 이를테면 철학개론과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에서 차근차근 가지를 쳐가는 강단의 커리큘럼과 달리, 이들 단체는 철학자와 미술 작품에 대해서 논하고, 문학평론가와 세계 정치 정세를 고민하며, 한의사와 함께 기철학적 주제에 몰두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전 전문 지식보다는 유연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이 접근성을 높인 셈이다.

신선한 강좌 … 민주적 운영구조 강조


커리큘럼의 진보성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진리 탐구와 도덕적 인간 육성이라는 강단 인문학의 기치 대신에, 욕망에 충실하기, 기성 사회 구조에 파열구 내기, 가로지르기를 통해 새로운 지식-삶 모델 창출하기 등을 내세운다. 아무래도 대중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들 단체가 대중의 호응을 얻고 있는 데는, 커리큘럼의 흥미로움과 진보성 외에도 다른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민주적인 운영 구조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유+ 너머, 다중 지성의 정원,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등 많은 단체들의 경우 따로 위계적 의사 결정 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강좌 개설, 강사 섭외, 행사 운영, 실무 등 모든 업무가 공동의 회의 자리에서 결정된다. 상임대표체제로 운영되는 철학아카데미 같은 경우에도 9명이 상임대표로 있어 민주성을 확보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민주적 운영에 대해서 이들 단체는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고 있다. 새움 같은 경우에는 내부 구성원들이 의견이 조율되지 않아 공식 인터뷰 요청에 응할 수 없다고 밝혔고, 다중 지성의 정원은 ‘대중과 소통, 실천을 위해 어떤 모색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 질문은 마치 ‘대중’과 다중 지성의 정원이 서로 분리되고 고립돼 소통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응수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수유+ 너머의 고병권 박사 역시 “우리 자신이 대중, ‘연구자 대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대중의 한 사람인데 대중으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민주성에 방점을 찍는 배경에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강단으로부터 배제된 연구자들과, 역시 강단에 불만을 지닌 대중의 남다른 문제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커리큘럼이 편향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곧 단체의 좌장격 중심 인물들이 선호하는 사상 중심으로 강사가 섭외되고, 강좌가 꾸려진다. 예를 들어 수유 + 너머는 들뢰즈를 자주 다루고, 다중 지성의 정원은 네그리를 많이 다루며, 새움에서는 알튀세르 관련 세미나가 종종 개설된다. 이정우의 철학아카데미는 역시 들뢰즈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수유+ 너머와 달리 보다 철학사적인 맥락에서 존재론적 측면에 방점을 둔다.

특정 강좌를 떠나서, 인문학을 대하는 전반적 자세와 관점에도 차이가 두드러진다. 수유+ 너머는 지식의 즐거움을 강조하고, 다중 지성의 정원은 다소 아나키즘적 풍토에서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식을 강조한다. 이정우의 철학아카데미는 보다 학문적인 깊이에 중점을 둔다.
이를 두고 고병권 박사는 “특정 철학자나 사상 조류와 친근하다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잘 모르겠다. 이 철학도 조금 지지하고, 저 철학도 조금 지지하는 식으로 공부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불편한 진실을 감수할 용기 필요

그러나 관점과 이론이 첨예하게 난무하고, 무엇보다 공정하게 지식의 지평을 가늠하는 혜안이 중요한 인문학 분야에서, 이러한 ‘이너서클’ 식 구성은 대중의 시야를 제한한다는 지적이 있다. 더구나 어느 정도 특정 이론과 사상가의 ‘진영’을 구분할 수 있는 전문가와 달리,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특정 단체의 편협한 관점을 전부로 받아들일 우려가 있다. 대학 강단의 커리큘럼에 대해선 다양성 부재를 이유로 비판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커리큘럼만 내세우는 것은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결부해 지나치게 대중의 기호와 흥미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 철학과 교수는 “대학은 차근차근 기초부터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게 하지만, 아무래도 흥미를 중시하는 이들 단체에서는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강단 인문학의 위기를 대중과 직접 호흡하면서 이겨보겠다는 근본 취지에서 비롯한다. 문제는 단체를 구성하고 찾는 대중이 불편한 깨달음을 감내하는지에 있다. 인문학의 요체는 듣기 좋기 보단, 우리의 여기와 지금을 불편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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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씀 2009-03-03 14:02:45
강단밖 대학밖으로 나온 인문학 강좌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이게도 강단권력의 현 모습이나, 앙상하게 남은 대학내의 그들만의 인문학에 대한 옹호로 들립니다. 사실 그렇게 많은 강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건 대학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삼아할 일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강단밖으로 뛰쳐나가고, 어려운 물적, 심적 기반에서도 끊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게 공허한 대학의 현재에 대한 방증 아닐지요. 강좌나름의 고집스런 학문적 행보를 편향으로 몰아갔으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번져나가는 그 지형이 왜 문제인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요. 소통을 얘기하면서 오히려 대학과 강단의 불통의 차단막을 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강단밖이든 강단이든, 대학안이든 밖이든 학문의 길에 서 있는 자리는 한가지로 봅니다. 서로를 존중하면서 깊이를 더할 수 있는 더 많은 계기를 만드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