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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위기에서 배우는 여섯가지 비결
10년전 위기에서 배우는 여섯가지 비결
  •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 승인 2009.02.23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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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시장 활성화를 제언한다

출판 불황이 심각하다. 미국발 금융 위기에서 촉발된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가계의 가처분소득 감소로 인해 도서 판매량이 격감했기 때문이다. 출판시장의 노른자위인 교육 관련서가 그나마 버티고는 있지만 전반적인 침체는 불가피한 양상이다. 이에 상당수 출판사들이 감원과 비정규직 전환 등으로 감량경영에 나서거나 발행 종수를 줄이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지난 11월에 실시한 ‘출판시장 불황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 출판사의 40% 가까이가 이미 직원을 감원했다는 통계 수치도 있다. 특히 환율 상승에 외국 번역서 출간을 자제하는 분위기도 역력하다.

허나 오늘의 출판 불황은 단지 경기 침체의 여파로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즉 경기순환에서 해법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디지털화, 글로벌화, 그리고 다매체 다채널 기반의 영상사회화, 활자매체의 퇴조 등과 같은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화에 출판 관련 기업들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구조불황이 더욱 심화될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우선, 해법 모색의 단서로 10년 전 IMF 구제금융 때 출판계의 위기 대응 양상을 살펴보는 것이 참고가 될 것이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한국출판연감』에서는 “경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이후 (중략)  대학에서는 복제된 교재가 상습적으로 사고 팔리는 저작권 수난 시대가 되고 말았다”고 통탄했다. 환율 상승에 의한 종이값 급등과 번역 출판 감소도 현재와 비슷했다. 대형 도매상의 연쇄부도 사태는 출판시장의 위기를 상징했다. 그 파급효과로 사실상 출판활동을 중단한 출판사가 천 여 곳, 문을 닫은 서점도 전체의 20%인 천 여 곳에 이르렀다. 대형 베스트셀러가 없는 가운데 매출액도 30% 이상 격감했고 실직 가장을 상징하는 『아버지』가 많이 팔렸다.

그런데 오늘의 시점에서 당시를 되돌아보면 출판계가 적절한 자구노력을 경주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로 발생한 외환위기 사태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도매상 연쇄 부도 사태 역시 출판유통 구조의 위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나아가 출판산업의 붕괴를 우려한 정부가 긴급자금을 지원해 도매업체 구제에 나섰으나, 그 이후 대다수 도매상들이 원상 복귀했을 뿐 적절한 유통 구조 혁신이나 유통 합리화가 이뤄지진 않았다. 출판유통의 위기 사태를 단행본 출판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결성된 한국출판인회의는 10년 넘도록 출판유통 문제 해결에서만큼은 사실상 진척이 없었다.

바뀐 것이 있다면 1998년을 전후해 설립된 전업 인터넷서점 등을 위주로 할인판매가 범람해 도서정가제가 형해화되고 거품가격에 의한 독자의 책값 불신, 가격 경쟁력을 잃은 대다수 중소서점들의 폐업 도미노가 촉진됐다는 것이다. 한국 출판계가 위기 대응 능력이 없기는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다.

전반적인 출판환경도 개선된 것이 그다지 없다.물론 IMF 구제금융 시절과 현재 상황은 경기 침체의 원인이나 나타나는 현상이 다르므로 동일한 잣대로 위기의 해법을 논하기 어렵다. 오히려 복합불황, 구조불황, 매체불황 성격이 더 강해진 오늘의 여건에서는 근본으로 돌아가 출판생태계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출판사의 특성화된 콘텐츠 전문화가 필수다. 불황 속에서도 특정 분야의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은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 덕분에 상대적으로 건재한 모습을 보인다. 특화된 지식·정보·교양·오락 콘텐츠를 종이책과 디지털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 형태와 상품화로 연결시키는 전문 콘텐츠 생산력은 향후 출판시장 발전의 요체가 될 것이다.  

둘째, 출판계는 저자 양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 우리 출판은 신간 3권 중 1권, 팔리는 책 2권 중 1권꼴로 번역서일 만큼 외국 콘텐츠 의존도가 높다. 달리 말해 국산 콘텐츠의 경쟁력이 빈약하다. 거액의 로열티를 불사하며 외국 번역서를 펴내기보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외수(해외) 시장 창출을 위해 세계 수준의 국내 저자 양성에 투자할 때 그 과실과 가치사슬은 더욱 커질 것이고, 비로소 한국 출판계는 ‘보따리 수입상’의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유통구조를 혁신해야 한다. 출판시장의 모세혈관인 전국의 중소서점들이 가격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폐업하는 등 책 구매의 접근성과 마케팅 소구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황이다. 어쩌면 출판 불황의 심화는 글로벌 경기침체가 아니더라도 유통 측면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소수의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만으로 시장의 잠재수요를 충족시키기는 어렵다. 일본은 도서시장 규모가 우리의 3배이지만 서점 총면적은 우리의 10배나 된다. 좌판조차 제대로 펴지 않고 손님이 없다고 하거나 국민의 독서율 탓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상적으로 책을 접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 서점 및 책 판매 공간을 대폭적으로 확충하는 한편, 확고한 도서정가제 정립을 위한 법제 개선이 요구된다.
넷째, 문고본이나 페이퍼백과 같은 염가도서 출판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는 불황 대책으로서만이 아니라 독자의 책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유력한 방법이다. 출판 선진국일수록 염가본 출판이 활발한 이유를 곱씹어볼 만하다.  

다섯째, 우리 출판의 해외 진출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근래 우리 정부도 출판수출 활성화를 위해서 각종 정책을 펴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글로벌 출판시장의 흐름을 꿰뚫고 양질의 콘텐츠, 고급 번역, 해외 네트워크의 3박자를 갖춰야 한다. 근년에 중국이나 동남아 각국에서 급증하는 한국 책의 번역출판 수요를 볼 때 외수시장은 더 이상 꿈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독서문화진흥법까지 제정한 나라답게 국민의 기본권으로 ‘독서권(책 읽는 권리)’을 보장하는 수준 높은 공공 문화복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정부 정책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각종 도서관의 증설과 장서 구입을 대폭 확충해 국민 누구나 자신이 처한 여건과 무관하게 좋은 책을 빌려읽을 수 있도록 한다면 학술도서 등 출판시장의 확대는 물론이고 국민의 삶의 질도 제고될 것이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필자는 1995년부터 한국출판연구소 재직했다. 한국출판학회 이사 및 일본출판학회 정회원이다.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등에 출강하고, 출판 관련 프로젝트 다수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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