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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근대인들의 서로 다른 이상향
[책들의 풍경] 근대인들의 서로 다른 이상향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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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22 17:04:36

『새로운 아틀란티스』(F.베이컨 지음, 김종갑 옮김, 에코리브르 刊)
『유토피아』(T.모어 지음, 김용일 역주, 계명대출판부 刊)

1960년대초 급진적 사회주의자로 불렸던 라이트 밀즈는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비난하며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체가 우리 힘을 결집시키는 주된 원동력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변화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제도의 구조, 정책의 근본을 따지는 문제는 그 다음 차례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상상력을 노예상태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자아의 절대적 정당성을 배신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상상력만이 나에게 미래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지표다”라고 주장한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루통의 말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이런 주장도 있다. 알렉 노브는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의 미래’(백의 刊)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실현 가능한 사회주의란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어떤 공상이나 유토피아에도 매달리지 않고 우리 자신의 생애 동안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회를 의미한다. … 그러므로 비옥한 유토피아와 황폐한 유토피아가 있다는 블로흐의 말은 아마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해롭지 않은 유토피아들과 해로운 유토피아들이 있다는 것으로.”

토마스 모어, 과거 시제의 ‘성직자’ 정치 꿈꿔

한편 러셀 자코비는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刊)에서 이렇게 끝맺는다. “1968년 파리의 건물 벽에는 ‘상상력의 힘을!’이란 구호가 나붙었다. 초현실주의자와 상황주의자가 보여준 유토피아적 구호였다. 1960년대 내내, 약물과 꿈과 상상력은 질식할 듯이 답답한 현실을 산산조각내주는 원동력이었다.” 갈증을 불러오는 현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세계화라는 거대 축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을 국소적인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프리바토피아’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과거에서도 발견된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고 또 상이한 이상향을 꿈꿨지만, 시간의 널따란 지평 속에서 반복의 국면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그 반복의 범주를 최소한 ‘근대’로 둘러쳐 볼 수 있다. 최근 간행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정점에 이른 듯한 오늘날 현실의 예언처럼 보인다. 반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베이컨의 유토피아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근대가 막 기지개를 켰을 무렵 그들은 무엇을 근심했고 또 무엇을 꿈꾸었나.

“제가 생각하기에 유토피아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일 뿐 아니라, 공화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공공의 이익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자기 자신의 개인 재산만 돌보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사유 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인의 재산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고 사회에 대한 의무에만 열성을 다 기울이면 됩니다.” 토마스 모어는 16세기 초반 라파엘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주장했다. 이에 대한 공통적인 견해는 이렇다. 모어는 16세기 초반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치유책으로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했다는 것. 이는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확인된다. “사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제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슬프게도, 부자들이 사회 조직이라는 제도하에서 자기네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음모를 꾸미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편 정지창 영남대 교수(독문학)는 ‘유토피아·유토피스틱스·리얼리즘’이라는 논문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를 이렇게 평가한다. “과거시제의 유토피아-가령 잃어버린 낙원으로의 복귀나 ‘좋았던 그 시절’의 재현 등-는 많은 반면에 미래시제의 유토피아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이성적’이고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공간 유토피아에서는 금욕과 이타심을 체화하도록 훈련된 주체들의 이해 관계가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와 일치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모어의 논의가 플라톤의 이상국가 기획의 연장선 속에서 파악된다는 견해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철인 정치에서 ‘성직자’ 정치로의 둔갑. 그러나 사유재산을 거부하고 재화의 공동분배를 꿈꾸었던 점만큼은 여전히 가치 있는 논의로 남는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원형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어의 논의와는 달리 베이컨은 현실에 펼쳐진 과학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유토피아론을 펼친다. 그의 유토피아론이 어떤 점을 지향하고 있는 지는 벤살렘 왕국의 솔로몬 학술원에 대한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학술원의 목적은 사물의 숨겨진 원인과 작용을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활동의 영역을 넓히며 인간의 목적에 맞게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이컨의 논의는 ‘과학적 유토피아’라고 명명된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통해 베이컨은 바다를 항해하며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처럼 보이기도 하며 과학과 이성의 힘을 신뢰하며 그것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파우스트와도 닮아 있다.

이 책을 번역한 김종갑 건국대 교수(영문학)는 이렇게 설명한다. “베이컨의 유토피아는 비판의 궤도가 아니라 희망의 궤도 위에 놓여 있다. 이 희망의 궤도에 실려서 그의 유토피아는 미래 과학 세계를 향해 질주한다. 베이컨의 과학적 유토피아에서 인간의 꿈은 곧 현실이 된다. 유토피아라는 어휘에 깃든 ‘없다’와 ‘좋다’의 모순은 과학의 힘으로 지양되는 것이다. ‘좋은’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풍요의 창조’를 꿈꾼 베이컨의 실용주의적 이상

모어의 유토피아론이 행간에 윤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베이컨의 유토피아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치를 담는다. 그러나 자코비는 “베이컨은 ‘빈곤의 나눔’을 넘어서 ‘풍요의 창조’를 꿈꾸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현실의 한 평이 유토피아의 만 평보다 낫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땅 한 평이 삶의 목표인가. 그것이 현실의 가능성을 뛰어넘는 모든 욕망을 억눌러야 할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실리성을 추구하는 유토피아론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그 실리성은 과학이 보여주는 장밋빛 미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사실을 두고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과학을 보며 음울한 전망을 했다. 이 엇갈린 전망은 우리 시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암울한 현실에 대해서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과학의 진보에 대해서는 디스토피아적 허무가 교차하고 있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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