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2:40 (목)
[깊이읽기]: 『혼돈의 기원』(로버트 브레너 지음, 전용복·백승은 옮김, 이후 刊)
[깊이읽기]: 『혼돈의 기원』(로버트 브레너 지음, 전용복·백승은 옮김, 이후 刊)
  • 권진욱 기자
  • 승인 2002.03.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3-22 14:21:31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위기이론’은 존재하는가. 자본에 의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전지구가 들끓고 있는 지금, 한때 한국의 변혁 세력을 호령하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명제는 일국적, 교조적 스탈린주의라는 혐의를 뒤집어쓴 채 퇴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기치유능력을 상실한 채 만성적인 위기에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 경제의 현실은 방임의 전통을 강조하는 신고전파에게는 물론, 거시경제 정책의 조절기능을 신봉하는 ‘케인지언 종합’에게도 처방전을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병세가 짙어지고 말았다.

로버트 브레너의 ‘혼돈의 기원:세계 경제 위기의 역사 1950∼1998’(원제 ‘The Economics of Global Turbulence’)은 국내 일간지들을 통해서 ‘신경제의 덫’을 조명한, ‘읽어볼 만한 책’으로 소개됐다. 그러나 사실 이 책의 핵심은 최근의 경향보다는 좀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원인규명하는 데 있다.

브레너에 의하면 전후 1965년경까지의 세계적 호황은 독일과 일본이 주도한 후진성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성장의 결과였다. 이들이 시장을 공략해옴에 따라 고비용의 미국 제조업은 가격저하 압력으로 인해 이윤율이 저하되는 저효율 상태에 놓이게 됨으로써 경제불황이 시작된다. 하지만 1973년 이후 공화당, 민주당 정부의 통화주의와 케인즈주의를 절충한 노력은 실질임금 성장 억제와 달러화의 대폭적인 평가절하에 의한 일시적 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실질 이윤율의 궁극적 향상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정치조직인 ‘연대’(Solidarity) 그룹의 일원이기도 한 브레너는 자본주의 이행논쟁에 있어 경제사 교재의 한 장을 이미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 브레너 논쟁’으로 알려진 1970년대의 논쟁에서 그는 ‘정통’에 가까운 입장에서 프랭크와 월러스틴 등 내노라하는 좌파 진영의 ‘일탈’을 꾸짖는 역할을 담당했다. 중세 초기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시장 교환을 위한 도시의 출현과 생산의 전문화를 강조하는 월러스틴 등의 견해는 브레너에게 있어 교환 관계가 계급 관계에 우선하는 스미스적인 ‘유통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교환 본능’이라는 초역사적인 전제가 아니라 지주계급에 저항하는 농노들의 역량이야말로 이행과정에 결정적인 변수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른바 현재진행형의 ‘신 브레너 논쟁’에서 그는 미국, 일본, 독일의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전후(1950∼1998년) 자본주의의 호황과 구조적 위기에 대해 규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이행기의 ‘자본 일반’과 노동 사이의 대립을 분석했던 과거와는 정반대로 현대 선진자본주의로 넘어와서 자본과 자본 사이의 경쟁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 같은 노장의 난데없는 ‘변신’에 대해 미국 경제사학계는 다시 한번 치열한 논쟁에 휩싸였다. “역사학자답게 실증적인 자료에 기반해 독창적인 공황론을 제시한다”는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평가나 브레너 자신의 문제제기를 토론을 통해 다시 답하고 덧붙이는 모습을 보아도 그의 지적 성실성은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

브레너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독점자본의 강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1965∼1973년의 황금시대를 정점으로 자본간 경쟁의 격화로 인해 이윤율이 저하되고 있기 때문에 초래됐다고 주장함으로써 비주류 경제학에 새로운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지난 세기 내내 세계 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죽은 노동’의 비중 증가)로 인한 것이라 진단한 마르크스주의의 정식이라든가 노동자 임금상승을 이윤율 저하의 주범으로 모는 신리카도주의의 진단을 확실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한편 주류 경제학자들이 신 브레너 논쟁을 통해 가장 많이 지적하는 부분은 브레너가 ‘혁신이 시장을 활성화시킨다’는 슘페터적인 설정을 무시했으며, 제조업 실적에 대해 지나치게 의미부여한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의 동아시아발 세계적 경제위기는 제조업 부문보다 금융 부문의 국제적 취약성에서 발발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국제 금융의 역할에 대한 부연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브레너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을 통해 이 부분을 일부 추가하기도 했다.

권진욱 기자 atom@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