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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교수 생활기 7] 파란만장 ‘딕’
[나의 미국 교수 생활기 7] 파란만장 ‘딕’
  • 김영수 켄터키대·언론학
  • 승인 2008.12.31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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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학교 시스템이 가을 학기와 이듬해 봄 학기를 묶어서 한 학년이 되는지라 겨울 방학은 사실, 방학이라기보다는 ‘브레이크’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1월 중순이면 개강이니 느긋이 앉아서 여유를 즐길 시간이 없는 셈이다. 그래도 연말이 되니,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미국식 나이 계산법으로야 해가 바뀐다고 한 살 더 먹는 것도 아니지만 한국식으로는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이니 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옴이 무작정 반갑지만은 않다. 연일 경제 위기에 대한 뉴스가 쏟아져 나오고 대학가에서도 신규 임용 중단이니, 연봉 동결이니 하는 소식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 새해를 맞는 희망보다는 상황이 더 나빠지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이 훨씬 더 크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문득 지난 학기 내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이 떠오른다. 딕(Dick)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그 학생은 대부분이 85, 86, 87년생들인 그 수업 학생들에겐할아버지뻘인 71세의 노인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해병대 장교였고 사진 기자와 영화 촬영 감독을 거쳐 마지막에는 영화 감독까지하고 은퇴한 그는 캔터키대학의 노년층 주민들을 위한 무료 대학 강의 청강 프로그램을 통해 나와 만나게 됐다.
청강이니 그냥 쉽게 수업만 듣고 과제물 등은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어린 학생들보다도 두 배로 열심히 숙제를 했고 시험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내었다.

수업 시간에 대부분 조용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여느 학생들과는 달리 곧잘 질문도 했다. 상당히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바람 긴장해서 듣지 않으면 질문의 요지를 놓칠 수도 있었던지라 내 입장에서는 힘들기도 했지만, 한  학기동안 지내면서 그를 점점 더 많이 알게 되니 사는 모습이 여간 멋진 게 아니었다.

중년의 자녀들을 둔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 동호회 회원이고 취미로 섹스폰을 멋드러지게 부르는 딕은 부인과 사별한 후 얼마 전에는 고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여인과 결혼을 한 새 신랑이기도 하다. 물론, 결혼식을 앞둔 그 당시에도 수업에 빠지지않는 열정과 성실함을 보여줘 나를 감동시켰다.
딕은 193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흔히 하는 말로 ‘산전 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어봤을 것이고, 삶의 길목에서지금과 같은 경제적 위기도 숱하게 넘겼을 게다. 그럼에도 항상 적극적이고 건강하게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는 딕을 보면서 ‘이제서야’ 마흔을 바라보는 나는 휠씬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김영수 켄터키대·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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