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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지식인은 지고 ‘시민적 지식인’ 떠올라
전통적 지식인은 지고 ‘시민적 지식인’ 떠올라
  • 교수신문
  • 승인 2002.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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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 새로운 지식인상을 논하는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강수택 지음, 삼인 刊), 『시민의식과
시민, 민중 그리고 지식인. 이러한 단어들은 어원에 따라 표현과 의미가 제 각각이다. 지식인이란 단어만 해도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프랑스로부터 전세계로 확산된 지식인이라는 표현과 인텔리겐챠라는 유의어 외에도 다니엘 벨의 ‘지식계급’, 피터 드러커의 ‘지식노동자’, 신중간계급 등과 같이 수도 없는 변주가 양산돼 왔다. 그 어휘만큼이나 지식인이, 혹은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자가 시대의 모순과 한계를 딛기 위해서 사회를 바라보고 참여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게 누적돼 왔지만 명쾌한 대답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신지식인이라는 캠페인까지 요란하게 스쳐지나간 논쟁의 자리는 마치 단물 빠진 껌처럼 스산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식의 표현을 빌자면 “모순은 해결되기보다는 유예”됐다. 강수택 경상대 교수(사회학)의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 정수복 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의 ‘시민의식과 시민참여’는 치열했지만 유예됐던 과거의 지식인론을 되묻고, 2000년대식의 논법을 찾아 나선다.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는 지식인론의 역사를 서구사회와 한국사회,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축으로 나누어 논의하면서 지식인 상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조직화된 근대성’(organized modernity)이 구축되는 과정에 살고 있던 만하임과 그람시가 ‘자유부동하는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내세웠던 반면, 2차대전의 발발과 전후의 혼돈을 겪었던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지식인’을 이야기한다. 물론 노동계급에 대한 당파성이나 조직화 등에서 다소의 편차는 있었지만, 저자는 이들 근대적 지식인론자들이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계몽주의적이며 역사 속의 보편적 목표를 추구하였다는 공통점을 유추해낸다.

반면 경제위기로 인한 사회적 협약의 붕괴, 복지국가의 위기, 생산양식의 재편, 탈제도적 정치행위의 등장으로 조직 자본주의와 조직 민주주의가 한계를 맞게된 1970년대를 겪으면서 근대적 지식인론도 비판의 도마에 오르게 된다. 1968년의 국면에서 사르트르 역시 목소리를 드높였지만 노동자, 학생, 여성, 죄수 등 다양한 집단의 목소리가 단일한 원소로 환원되기 어려움을 갈파한 푸코는 “우리가 이제 ‘위대한 작가’라고 하는 인물이 사라져감을 경험하고 있다”고 비아냥댄다. 푸코야 보편적 지식인이 아닌 ‘특수적 지식인’의 상을 사유했다지만 리오타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인의 종언’을 고한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로서 알제리 해방운동에 나섰으나 뒤돌아 섰던 리오타르가, 해방과 사유라는 거대 서사에 호소하는 근대성의 그림자를 보고 ‘지식인의 무덤’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소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서구 지식인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근대화와 탈근대화의 병행, 혹은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으로 인해 “잔존하는 전근대성”의 부정적 측면이 논의의 지형에서 커다란 단층을 형성한다. 저자는 각 시대별로 지식인의 유형을 제시한다. 1950년대가 도피적이고 실천이 결여된 ‘창백한 인텔리론’이 병약한 사회비평에 그치는 시기였다면, 1960년대에는 근대화 인텔리겐챠론의 기능주의와 대결했던 ‘비판적 지식인론’이 정권비판을 시도한다. 이러한 밑그림에서 비판적 지식인론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역사 주체인 민중에 기여하는 한완상, 송건호 등의 ‘민중적 지식인론’으로 그 대계를 완성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경제적 불평등과 맑스주의의 영향으로 이념적 균열을 보였던 ‘진보적 지식인론’이 대두하게 되지만, 1990년에 들어서면서 탈산업사회론, 탈식민주의론 등이 대두하면서 지식인사회는 기존 지식인론에서 보였던 엘리트주의, 맑스주의 편향 등을 자기비판하고 성찰성과 해석적 역할을 함께 부각시키게 된다. ‘탈근대적 지식인’, ‘해석적 지식인’, ‘가로지르는 지식인’, ‘독립적 지식인’, ‘기지촌 지식인’과 그 밖의 유사 지식인론이 나온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위에서 열거했던 지식인론들이 “일상 생활의 관점”의 프리즘을 통해 비쳐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시민적 지식인’에 관해 이야기한다. 전통적 지식인의 보편적 역할은 종언을 고했지만 하버마스의 ‘해방적 관심’을 환기시킬 비판, 제임슨의 ‘인식의 지도그리기’, 부르디외의 ‘지식인 간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공동체에 기여할 필요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시민의식과 시민참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식인이기를 자임하려는 ‘시민적 지식인’의 지적 이력을 담고 있다. 대학과 학술단체 대신 연구소와 시민단체에 몸담아온 저자는 전문가 중심의 ‘백화점식 운동’, ‘언론 플레이 의존성’, ‘시민없는 시민운동’ 등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의 문제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시민사회는 국가의 관료적 폐쇄성과 시장의 사적 이익추구와는 구분되는 공적 목표를 가진 자원적인 결사체이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단체, 대학, 노조, 언론, 친목모임, 문화단체 등을 광의의 시민사회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며 공익의 추구 여부에 따라 즉자적 시민사회와 대자적 시민사회를 구분해야함을 역설한다. 저자는 현재의 시점에서 시민운동은 ‘시민참여형’을 넘어 더욱 포괄적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는 ‘문명전환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진단한다. 민주주의 함양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민적 덕성뿐만 아니라 현대문명의 한계를 인식한 생태주의적 가치가 함양돼야 하는 것이다.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지속가능한 사회” 등의 생태주의적 시민운동의 금언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책은 금과옥조가 지켜지기 위해 단기적인 처방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 텔레비전과 공론의 형성, 현실정치와 시민운동, 지역 시민운동, 시민사회의 세계적 연대 등과 같이 현대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의 문제들을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강수택 교수는 지식인의 위상과 소명에 대해, 정수복 소장은 시민운동의 정당성과 진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는, ‘논의의 前史’ 편에서 주마간산 격으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황현, 유길준 장지연, 신채호, 임화, 서재필 등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이 백가쟁명하며 벌였던 논쟁을 적은 비중으로 할애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조선시대의 붕당사 연구를 접하는 듯한 이념형적 분석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시민의식과 시민참여’는 문명전환형 시민운동을 위해 밑받침돼야 할 생태주의적 개종이나 영성에 입각한 성찰성이 이 책의 사회과학적 글쓰기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지만 정책 과제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권진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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