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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겨울 맞는 것이 땅 뿐이랴
[문화비평] 겨울 맞는 것이 땅 뿐이랴
  •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 승인 2008.12.23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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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학 캠퍼스에도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겨울은 그동안의 수확을 가름하면서 지나온 계절을 반성하고 다시 새로운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겨울은 나무와 동물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다음 해의 창조적인 삶을 준비하는 역동적인 휴지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오면 저문 가지마다 새잎이 돋아나듯 대학 캠퍼스에도 신입생들이 가득 피어날 것이다. 겨울이 봄에게로 가는 고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잠시 멈추는 휴식이 필요하다. 들녘에 나가보면 겨울에도 땅을 최대한 이용하기위해 비닐하우스가 지천에 덮혀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밖은 삭풍이 휘몰아쳐도 비닐하우스 안은 난방 덕분에 딸기가 자랄 수 있을 만큼 후끈거린다.
한겨울에도 딸기를 찾는 소비자들의 인위적인 욕망 때문에 비닐하우스의 땅은 올곧은 겨울을 경험하지 못한다.

밑도 끝도 없이 지력을 이용하다보니 결국 땅은 차가운 기온 속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온전히 내팽개쳐지지 못함으로써 사실상 내실을 다질 기회를 놓치게 된다. 비닐하우스 농사를 연속해서 몇 년 하면 결국 지력이 상실되고 만다는 것을 농부들은 잘 알고 있다.

어디 땅만 이와 같으랴. 학문에도 겨울이 필요하다. 학문도 농사와 같은 이치일 것이다. 이모작, 삼모작도 계절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을 때 풍성한 수확을 약속하는 것이며, 대량생산, 대량수확도 화학비료나 농약이 아닌 땅의 드센 정기로 이루어질 때 우리 몸에 이로울 것이다.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을 때 벼를 벨 수 없듯이 학문도 그 내부에 조용히 들끓는 열기가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옹골차게 영근 낟알을 토해낼 수 없다. 기껏 한 해 농사가 쭉정이로 끝나 실제로 사람들의 배를 불리지 못하게 되면 아무런 사회적 의미가 없듯이 학문의 성과도 내실 없이 무용지물로 끝나게 되면 사회변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사회를 바꾸는 것은 학문의 양이라기보다는 학문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 알의 낟알이 영그는 데는 비단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해와 달과 별과 바람의 힘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농부의 지난한 애정이 필요하다. 학문도 이와 같을 것이다. 좋은 동료와 제자가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기다려주는 애정이 필요하다. 진정한 농부는 자신의 농사가 한결같을 수 없음을 안다. 

병충해나 잡초를 막기 위해 강력한 살충제나 제초제를 뿌리는 것보다 다른 농작물을 논두렁에 두런두런 같이 심어주는 것이 벼나 사람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농부는 안다. 모든 작물을 천편일률적으로 가름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안다. 학문도 이와 같을 것이다. 약한 것, 작은 것,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있기에 실상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저 들녘이 아름다우리라.

어떤 신비한 힘이 땅에서 싹을 돋게 하고, 자라게 하며, 결국 우리의 배를 불리는 낟알로 만들어주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밥이 다시 거름이 되고 그 거름이 다시 밥이 됨을 알 뿐이다. 결국 자연에서는 무한한 성장이나 끝없는 발전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그저 순환할 뿐이며, 순환이야말로 우리에게 무한을 약속한다. 누구도 일생 내내 수직상승적인 성장과 발전을 경험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진실한 내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이며, 그것이 다시 거름이 되어 다음 학문세대가 싹트는 드센 땅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학은 결국 자신을 거름삼아 다른 싹을 틔울 때 그 사회적 역할을 완성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경제에도 겨울이 불어 닥치고 있다. 아무리 공무원이 재촉해도 농부는 수확량이 해마다 늘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과학과 기술의 힘을 아무리 빌려와도 제한된 땅에서는 제한된 양만 나올 뿐이다. 땅을 무한히 늘릴 수 없기에 같은 이치로 수확도 무한히 늘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구라는 제한된 조건에서는 무한히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 어느 한 쪽의 경제가 발전한다면 그것은 다른 한쪽의 경제가 나빠지기 때문이다.

어느 계층에게 부가 쏠린다면 그것은 다른 계층이 빈곤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무한한 경제발전과 부의 증가를 꿈꾸는 것은 마치 겨울이 없는 계절을 꿈꾸는 것과 같다. 겨울이 없으면 더 이상 봄도 오지 않듯이 경제도 어느 한쪽이 끝없이 독식한다면 결국 봄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박혜영 인하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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