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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場이 주도한 10년, 새로운 자율성이 필요하다
市場이 주도한 10년, 새로운 자율성이 필요하다
  • 강수미 홍익대 강사·미술 비평
  • 승인 2008.12.1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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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_ 1990년대 이후 한국현대미술의 창작과 수용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1930년대 서구 유미주의 예술의 한계를 짚고, 사진·영화 같은 새로운 기술 재생산 방식의 예술에 잠재한 혁명적 가능성을 논했다. 이때의 가능성이란 예술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좁은 자율성 틀을 벗어나, ‘지배와 착취 없는 사회’를 향한 대중운동에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역량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술 논제를 ‘역사적 작업’으로 개진하면서 벤야민이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현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었다. 말하자면 과거를 보는 현재 시점의 분명한 자기이해, 그리고 당대 문화를 있게 한 것으로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관계 설정이 예술의 문제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28일 일주학술문화재단이 주최한 ‘Back to the Basic: 한국미술 어디쯤 가고 있나’라는 심포지엄에서 나는 비평가로서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 지점에 대한 논고를 발표했다. 19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한국현대미술의 짧은 역사를 비평한 것인데(「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자율성을 위하여-1990년대 후반 이후 창작·이론·수용의 변화를 중심으로」), 주요 논의를 재론하고자 한다.
서두를 벤야민의 이론으로 열었던 것은, 이 논의의 기본 관점이 ‘현 상황에 대한 이해 및 과거와 현재의 의식적 관계’이기때문이다.

2008년 12월 현재 시점에서 한국 미술계는 작은 한 週期를 마감하고 새로운 흐름을 시작할 때인 것으로 보인다. 이 주기는 시간으로 따지면, 지난 1997년을 기점으로 지금까지의 약 10년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실험적 미술 형식과 내용의 전개→ 대안적 미술 제도와 담론의 생산→ 창작과 수용 거의 전 영역에 걸친 미술 시장의 압도→이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으로 이어지는 특정 순환을 이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한국이 IMF 구제 금융 체제에 들 정도로 경제 위기를 겪는 동안, 미술계에서는 긍정적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시작됐다.

그 변화는 거칠게 요약해서, 다양한 배경과 미적 성향을 가진 젊은 작가들의 급부상과 기성 주류 미술과는 다른 대안적 미술 활동이 창작에서 제도에 이르기까지 만개한 현상이다.
전자는 그때까지 한국 추상미술 이후 관례화된 미술 형식과 내용을 답습하던 중견작가 위주의 미술계에 이질적이거나 적나라한 시각언어와 여러 매체, 장르를 넘나들고 뒤섞는 표현 방법론으로 도전했다. 당시 ‘신세대’ 또는 ‘yKa(young Korean artist)’ 등으로 불린, 이들의 출현과 활동은 곧이어 미술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대안공간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활성화, 문예진흥기금 등 작가 지원 제도의 적극적 활용, 전시형태 · 전시방법론의 다양화 내지는 복합화가 그 대표적 변화이다.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우리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과거 이 두 변화 모두 가중된 경제난 속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술시장의 침체가 오히려 한국 현대미술 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과 수용의 공간을 열어준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무명인데다가 극히 젊었던 작가들의 미술은 애초부터 기존 미술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아트 마켓의 경기 또한 좋지 않았던 덕분(?)에 작가들은 ‘팔아야 한다는 강박이나 억압’ 없이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늦어도 2003년경부터 재 점화된 ‘세계 미술 시장 호황’은 1990년대 말 자유롭고 실험적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사회적 안정과 더불어 점차 지지부진해진 한국 현대미술의 여러 차원에 새로운 변수로 개입했다.

한국미술을 그토록 풍부한 문제제기와 혼성적인 실천으로 다이내믹하게 만든 힘의 핵심 원천이었던 젊은 작가들이 속속 상업 화랑과 전속(또는 그와 비슷한) 관계를 맺었다. 그 와중에 신생 화랑인 아라리오갤러리가 전폭적인 전속작가 지원제도를 내걸고 개입하면서 기성 상업화랑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의 예술가적 멘털리티까지 요동쳤다.

이러한 이행의 과정을 혹자는 자본주의 사회 미술의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경로로 볼 것이다. 그런 관점에 동의할 여지가 없지 않으나, 동시에 그 이행은 ‘한국 현대미술의 창조성, 그리고 무엇보다 자율성’을 크게 침해한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1990년대 급부상한 젊은 작가들은 현재, 시각적 효과 면에서 볼 때 초기 작품보다 더 스펙터클하거나 더 매력적인 작품들을 전시하며 자기 지평을 넓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가들이 아니라 이들의 신선한 부상과 그에 이은 상업적 성공이 다음 세대 젊은 작가들의 창작 환경에 끼친 영향이다.

전자의 행보와 작품들은 글자 그대로 학습 효과를 발휘하면서, 후자의 미술계 진로 전략, 그리고 작품의 주제에서 세부 기교까지를 결정해버린 경향이 있다.
이때 학습은 역방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前 젊은 작가들은 대안공간을 모태로 기성 주류미술의 문법을 해체하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미술의 외연을 넓혔고, 그 이후 아트 마켓의 기호와 상품 목록을 변경시키며 안착했다.

반면 後 젊은 작가들은 미술 시장의 취향과 규칙을 전자의 성공 사례를 통해 학습하면서, 소위 ‘시장 정향적 미술(market oriented art)’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예술과 세계에 대한 자기 문제의식에 앞서, 자기 창작과 표현 의지에 앞서, 이곳의 어리고 채 준비 안 된 작가 지망생들 내면에 이미 ‘시장의 법칙’이, ‘교환 가능한 상품으로서의 작품’이 미술의 유일한 원리이자 정체로 고착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창작 영역이 위축된 데는 분명 미술비평 또는 미술이론의 책임이 없지 않다. 아니 최신 유행과 강력한 상업 메커니즘 앞에서 허약한 내용의 비평과 이론, 또는 엄밀한 의미의 ‘비평’과 ‘이론’이 부재하면서 오히려 ‘자본에 압도된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이 제동 장치 없이가속화됐는지도 모른다.

90년대 말 한국 미술계 젊은 작가들의 실험과 도전은 꽤 많은 부분 영미권의 신미술사학과 신미술비평, 문화연구이론, 프랑스와 독일의 후기구조주의 사유와 매체이론을 이곳 지식의 場으로 수용하면서, 그 수용된 이론이 미술 창작의 장과 결합하면서, 나름의 의미 지평을 확보한 과정이다. 특히 세기 말을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각종 담론은, 그 이론적 수용의 정합성은 둘째치더라도 당시 여기 작가들과 ‘미술’이라는 특수한 영역의 정체성 변화에 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표어가 “돈의 리얼리즘”일 뿐이라고 일갈했던 리오타르(J. Lyotard)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90년대 말 경제난 속에서 문화의 이완된 자유를 구가했던 한국 현대미술은 앞에서 제기했듯 얼마 지나지 않아 돈에 경색됐다. 이 시간 동안 미술이론, 비평은 실천적 의미에서 부재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 지난 10년간 한국 현대미술의 변화 중에서 수용의 차원을 간과할 수 없다.
젊은 작가들의 흥행, 미술의 시장 정향화, 그리고 주도적 비평 및 이론의 부재라는 현재 상황 속에는 과거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결정권이 강해진 ‘문화예술의 대중 수용자’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대중’은 소소한 시간과 돈을 문화예술 향유에 쓰는 다수 관객이자 각종 문화예술 행사의 성공을 가늠하는 통계지표로 환산되는 다수의 소비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재 국내외 미술계에는 또 다른 수용자가 존재한다.
고학력 전문직에 재력이 상당하고, 어려서부터 해외여행과 유학을 통해 쌓은 ‘서구 문화적 교양을 바탕으로 자신의 미적 감각과 지식을 세련화한 新 엘리트 집단이 그런 수용자이다.

사실 이들이 지난 3년 여 한국 현대미술 시장에서 새로운 컬렉터 층으로 부상한 사람들이고, 대표적으로 ‘한국 식 팝’이나 ‘사진을 이용한 극사실회화’, 그 아류 작품들을 띄운 미감의 소유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미술의 수용자 중에는 극소수 거대 문화자본가가 있다. 세계 미술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보이지 않는 큰손’ 컬렉터들이 그들이다. 이 차원의 수용자는 수적으로는 극소수이지만, 동시대 미술의 장에서 작가 개인의 내면, 개별 작품 콘텐츠부터 한 나라의 미술관 시스템까지를 지배할 정도로 파워풀하다.

이상에서 나는 한국 현대미술의현재 상황을 정확히 보고자 했다. 하지만 분명, 이 글속에는 비평가로서 나 자신이 취하고 있는 특정한 입장과 지향이 작동하면서, 좀 더 비판적으로 본 양상들이 있을 것이고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은 긍정적 측면들도 존재할 것이다.

이 시점까지 그러한 내용들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말해져왔고, 그간 거품이 낄 정도로 부양시켰다고 보기 때문에 굳이 아까운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 필자는, 우리가 좀 더 다른 차원의 미술을 기대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그것은 요컨대 ‘물질에 얽매인 현 사회 공동체의 의식과 감각을 깨우고, 현재 삶의 체재 너머를 구체적으로 꿈꾸게 하는 미술’이다.
이를 위해서 미술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미술가들이 ‘시스템 편입자’가 아니라 ‘시스템 유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 팔릴 수 있는 미술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면화한 이가 아니라 ‘개인의 미적 자유가 곧 공동체적 삶의 자유로 승화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추동하는’ 예술가가 되자는 것이다.

미술의 보다 큰 자율성과 생산성은, 미술인들이 미술은 누구를 위해,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를, 이기적 차원에서 벗어난 지점에서 풀어나갈 때, 미술 스스로 확보하리라 본다.

 

강수미 홍익대 강사·미술 비평

홍익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미학연구자이며 미술비평가, 독립 큐레이터로 일한다. 홍익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신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작가제도가 작가들의 멘탈리티를 뒤흔들었다.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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