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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에콜로지카를 비판한다
[북리뷰] 에콜로지카를 비판한다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12.15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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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앙드레 고르 지음│임희근 외 옮김│생각의 나무│2008

최근 주목할 책이 나왔다.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라는 책이다.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대안적 전망을 내놓는 책들이 많은데, 비교적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고 있는 점이 주목을 끈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D에게 보낸 편지』로도 유명한 철학자이자 언론인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이반 일리치의 정치적 생태학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출신의 프랑스 사상가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생산을 위해 생산을 하는 맹목성,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소비의 필요성을 창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인간을 타율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곧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남겨놓은 자리라고는 한편으로는 자본에 복무해 보상받는 기능적 노동을 위한 자리,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에 복무하는 소비를 위한 자리뿐이었다”며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뭔가를 필요로 하기를 요구”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만 반추해 보면 저자의 지적은 진실이다. 우리는 자본의 이윤 창출에 삶의 대부분을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그 자본이 부추기고 만들어낸 제품, 이미지, 만족감,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보낸다.
영혼 없는 기계와 같은 시간의 연속 속에서 진정한 나는 누구이며, 내 삶의 자리는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은 실종됐다는 이야기다. 기껏 땀 흘리며 일한 대가를 다시 그 땀을 흘릴 조건들을 창출하면서(곧 자본의 배를 불리면서) 소비한다는 것이다.
생산, 발전, 번영 등 화려한 수사 속에 실질적인 나의 행복과 삶의 진전이란 없다는 저자의 시사점은 자동차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일리치의 논의를 들어보자. “전형적인 미국사람이라면 일 년에 1천500시간 이상을 차에 할애한다.

여기에는 차가 달리는 동안 혹은 서 있는 동안 운전대를 잡고 보내는 시간, 자동차 값을 지불하고 휘발유, 타이어, 통행료, 보험, 범칙금, 세금……등을 낼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시간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이 미국인은 (일 년에) 1만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1천500시간이 필요하다. 6킬로미터에 한 시간이 드는 셈이다. 운송 사업이 전무한 나라의 사람들이 걸어 다닐 때 걸음 속도가 정확히 이와 같은데, 게다가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아스팔트 포장한 도로가 아니더라도 다 갈 수 있다는 이점까지 갖는다.” 역설적인 이 상황은, 따지고 보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그다지 시간이 절약되는 것도 아닌데, 매연을 마시며, 짜증을 감수하며, 돈을 낭비하며(이는 곧 삶의 시간 낭비다) 자동차를 서로 타고 다니려는 상황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어디 자동차뿐이겠는가. 자본주의에서 삶이란 결국 제 살 갉아먹기라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이 책은 경제위기 시대의 생존법과 같은 시시콜콜한 책들이 난무하는 출판 시장에서 소금과 같은 책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대단한 책’이라는 찬사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이 책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결코 독창적인 것들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자본이 만들어낸 환상을 소비한다는 지적은 지금은 고인이 된 장 보드리야르가 장황하게 말한 바 있고, 마르크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 타율적 삶의 양상을 문제 삼으면서 자율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마르쿠제, 카스토리아디스 등 많은 사상가들의 구호이기도 했고, 그 연원은마르크스 이전에도 루소 등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저자는 ‘無償의 경제’를 지향하는 지식 경제로 인해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저자가 처음 한 이야기는 아니다.두 번째로 이 책은 자율성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 저자는 “생태주의 운동의 할 일은 삶을 바꾸는 일, 체계 위에 자율성과 체험된 사회성의 공간을 얻어내도록 모색함으로써 삶을 체계와 체계의 관리자로부터 빼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인간이 타율적 욕망의 노예가 돼 자신의 삶을 파편화시키고 있다는 저자의 인식에 비추어 당연한 주장이다. 그런데 자율적 삶의 구축은 어떻게 가능할까.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적 관점을 견지하는 입장이라면, 삶의 해방적 차원을 기획할 수 있는 상상력과 창조성 그리고 자유를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단언할 문제가 아니다.

근대 사회계약론은 대체로 원초적 개인에 대한 불신에서 그 이론적 동기를 찾는다. 자율성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무엇 때문에 국가와 제도와 법에 대한 이론적 모색을 했겠는가. 알튀세르나, 푸코, 라캉 등 20세기 구조주의 운동과 관련 있는 사상가들 역시 인간 자율성을 긍정하는 인간주의 전통에 비판적 관점을 견지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원천은 인간 외부의 조건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들을, 그가 책에서도 언급한, 과학적 독재를 말하며 비판할 수도 있지만, 사태가 그렇게 간단해 보이진 않는다.

저자의 소망(?)대로 우리가 체계로부터 삶의 전유에 대한 권리를 탈취했다고 치자. 그 다음엔 무엇이 있을까. 평화롭고 다채로운 삶의 만개가 있을까.

아니면 통제되지 않은 폭력과 야만, 순화되지 않은 저돌적 욕망의 돌발이 있을까. 필요노동 시간이 2시간으로 줄어든 대신, 확대된 ‘자율의 공간’을 채우는 얼굴들이 우호적인 이웃들일지, 끔찍한 악마들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일찍이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시인들이 노래한 황금시대의 허구라고 논평하고, 블랑쇼가 『미래의 책』에서 아르토를 언급하며 직접성의 환상(물론 블랑쇼의 맥락은 좀 다르긴 하지만)이라고 지적했으며, 데리다가 『기록학에 대하여』에서 순수성의 신화라고 한 어떤 순진함이, 이 책에서도 엿보인다. 중요한 것은 자율적 삶이라는 환상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현실의 착취와 폭력과 억압을 조금이라도 순화할 수 있는 물적 조건과 구체적인 실천 전략에 대한 사고가 아닐까.

사족을 하나 달자. 이 책은 번역본인데 편집 상태가 깔끔하지는 않다. 불어의 악센트나 철자 표기가 틀린 곳이 종종 보이고, 한나 아렌트를 ‘해나 아렌트’라고 표기한 부분은 실소를 안겨준다. 역자들과 편집자들은 정말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일까.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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