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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작대는 삶의 쇠조롱 속에 갇혀 저 눈시울 적시는 쪽빛을 피해왔구나!
복작대는 삶의 쇠조롱 속에 갇혀 저 눈시울 적시는 쪽빛을 피해왔구나!
  •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철학
  • 승인 2008.12.1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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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읽다

“선생님, 다빈치의 「모나리자」하고 바꾸자고 하면 어떻겠어요?” - “절대 안 바꾸지요. 글쎄,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에 「모나리자」와 「미인도」를 나란히 전시해서 세계 사람들에게서 평가를 받아보자고 제안할 수는 있겠지요.”
간송미술관을 나서면서 나의 미술 강의를 듣는, 대구에서 올라온 수강생과 필자가 나눈 대화다. 왜 나는 그렇게 혜원의 「미인도」에 대해 그렇게 자신만만해 했을까.

오리엔탈리즘의 오만에 빠져 서구 미술사를 세계 미술사로 덮씌우는 관행을 염두에 두고서 한 반발은 분명 아니었다. 10년 전 화려하고 거대한 루브르 미술관에 가서 방탄유리 속 「모나리자」를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에 비하면 남루하다고 할 정도로 허술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간송미술관에서 「미인도」를 본 것이다. 그런데 「모나리자」를 보았을 때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가슴 한 귀퉁이에서 흔히 하는 말처럼 뭉클 하고서 마치 억눌려 있던 순전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 하더니 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아닌가. 솔직히 고백하면, 지금도 나는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다.

예술 감각적인 충동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십 수 년 간 서양미술을 강의해 온 필자에게 혜원의 「미인도」가 예술 감각적인 충동을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저 그랬을 뿐이라고 발뺌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명색이 철학 공부를 30년 이상 해 온 인간이, 예술철학을 여러 방식으로 강의해 온 인간이 예술적인 충동 운운하면서 ‘그저 그랬을 뿐’이라고만 한다면 어찌 무책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눈시울을 맨 먼저 공략한 것은  「미인도」의 ‘미인’이 입은 치마의 빛깔이다.  

옥빛이다. 광물인 옥에서 튕겨 나오는 옥빛이 아니라,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비단결 한올한올에 스며들어 가라앉는 것 같으면서 은근하게 배어 올라오는 미려하기 이를 데 없는 옥빛이다. 여인의 오른손에 가볍게 들린 구슬 노리개를 잇는 푸른빛의 매듭이 여인의 오른쪽 가슴에서 시작해 세 개의 구슬을 관통한 끝에 열 한 가닥으로 풀어져 치마폭의 상단에 이르기까지 적당히 흐드러져 있는데, 거기에서 푸른빛이 발원해 옥빛의 치마 전체로 흘러넘친다. 그 탓에 치마폭의 옥빛이 어느덧 벌써 푸른 기를 낸다. 이 푸른 기가 저고리 왼쪽 손목 제법 넓은 끝단의 푸른 빛 강한 옥빛을 받아 전체적으로, 이른바 색채의 리듬을 타면서 살아 움직인다. 푸른 기 넘실대는 옥빛이 이렇듯 치마폭 전체로 흘러넘치는데, 필선으로 치자면 옅고 진함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날렵한 붓끝으로 간신히 그어놓은 듯한 치마의 주름 선들이 색을 막으면서 열어주고 열어주면서 막아내고 있어 그 색채의 리듬을 더욱 유려하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여인의 왼쪽 겨드랑이에서부터 흘러내린 가느다란 주홍 빛 장식 고름이 슬그머니 내려와 치마 왼쪽 꼭대기를 누르고 있어 이른바 보색대비를 이루면서 치마폭의 푸른 옥빛을 더욱 ‘미치게’ 한다.
 「미인도」의 색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고리의 빛깔과 배경 전체의 빛깔이 한 통속으로 한창인 가을날 빛을 잃은 갈대의 빛으로 채색돼 있다. 저고리의 윤곽과 접힘을 나타내는 먹빛 실선이 겨우 여인의 상체를 감추면서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저고리의 누런 갈대 빛이 전체 배경과 같은 색으로 돼 있어 저고리 속에 감추면서 드러내는 여인의 몸 기운이 어느새 강렬하게 바깥 공간 전체로 흘러넘치게 한다. 치마폭이 그저 옥빛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그 누런 갈대 빛의 흘러넘침이 적절하게 부풀어 있는 치마폭 옥빛을 다시 치고 들어와 마치 치마 속으로 스며드는 듯도 하여 은근히 치마 속 여인의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살결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배경을 포함한 그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색채와 선으로부터 생동하는 감각의 리듬을 형성해 낸다. 그 리듬에 시선의 몸을 실으면 저절로 여인의 몸속으로 함부로 파고들어 ‘음탕한’ 시선으로 돌변한다. 하지만 함부로 파고든 탓에 곧바로 그 시선의 몸은 쫓겨나 다시 바깥 리듬을 타고서 주유한다.
이 모든 색채적 감각의 운동을 지배하면서 도리어 강화하는 중심축이 있으니, 그것은 온 정성을 다해 정교한 다발 꼬임으로 틀어 올린 짙은 먹빛의 여인의 올림머리다.

전체가 한 덩어리인 듯 하면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예외 없이 살아있는 올림머리의 다발 꼬임은 그야말로 미세하기 이를 데 없는 솜씨로 최고도의 집중을 보이는 화가의 힘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그 백미는 오히려 왼쪽 귀 뒤 아래에서 나풀거리는, 너무 가늘고 짧은 나머지 미처 올림머리의 다발 꼬임에 끼지 못한 채 남아도는 몇 가닥의 실선 머리카락들이 오히려 머리를 올리고 나니 살포시 드러난 여인의 뽀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나도록 하는 데 있다. 여인의 뽀얀 목덜미는 물론 그림 뒤로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몇 가닥의 나풀거리는 짧은 실선 머리카락들이 뒤로 돌아 넘어간 여인의 뽀얀 목덜미를 여지없이 전면으로 끌어내는 대목에서 감각을 느낄 줄 아는 자라면 어느 누구라도 일순간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이때 함께 주어지는 것이 여인의 눈빛과 입 매무새다.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으면서 어느 한 곳을 바라보는 듯한 여인의 눈빛, 이 눈빛을 떠받치고 있는 오목하게 가볍게 다문 입, 그런 눈빛과 입 매무새를 이어지는 콧등의 직선과 둥글게 내민 콧방울의 곡선. 기어코 여인의 눈빛은 가슴 내면에서 애틋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이 넘쳐나는데도 결코 내놓고 표현할 길이 없는 안타까움을 애써 감추면서 드러낸다. 그 안타까움이 뽀얀 목덜미를 끌어내는 몇 가닥 나풀거리는 실선의 머리카락과 틀림없이 조응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정말이지 결코 놓칠 수 없는 대목은 이 여인의 흘러넘치는 내면의 감정이 부푼 치마폭의 너른 속 공간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실로 혜원 신윤복의 무서운 회화적 힘이 확인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절하게 부푼 치마폭에 대한 회화적 표현은 정작 치마가 아니라 치마 속 공간을 표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마치 치마 속에서 일정하게 긴장된 압력이 작용해 치마폭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그 긴장된 공간의 압력은 다름 아닌 이 여인의 눈빛에서 견딜 수 없이 강렬한 내면의 감정의 힘으로 나타난다.

색채를 통해 감각의 리듬을 확보하고, 선묘를 통해 이 색채를 통한 감각의 리듬을 일정하게 조율하고, 형태들의 소통을 통해 감정의 리듬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왠지 평생을 담장 속에 갇혀 지내야 할 것 같은 애환을 몸 전체에서 풍겨내는 특정한 한 여인의 삶이 화폭 속에서 고스란히 생동하게끔 하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그 앞에서 절로 눈시울을 적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렇듯 감각적인 충동이 넘쳐나는데도 애써 이를 피해 그저 복작대는 삶의 쇠조롱 속에 갇혀 살아왔구나 하는 회환 때문이 아니었을까.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퐁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철학아카데미에서 예술철학과 현상학을 강의하고 있다. 『예술, 인문학과 통하다』,『쉬르필로소피아:인간을 넘어선 영화예술』 등을 상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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