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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色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는 連帶를 어떻게 가능케 하는가
白色 혹은 마술적 사실주의는 連帶를 어떻게 가능케 하는가
  • 정재형 동국대·영화이론
  • 승인 2008.12.0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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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먼자 들의 도시’, 그 은유의 시선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페르난도 메이렐레스)는 노벨 문학상 소설 작가인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원작 소설을 할리우드에서 각색한 것이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가 당연히 있겠지만 큰 차이는 없다. 특히 그 주제에 있어서 소설과 영화는 둘 다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눈이 멀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서 찾아진다. 맹목, 실명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눈이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당히 철학적인 주제를 암시하는 이 영화의 기법은 사실주의적 수법의 영화는 아니다. 소설이나 영화 둘 다 마술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라는 기법으로서 중남미 문학이나 영화에서 유행하던 현대적 사조이다.

눈이란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외적 세계를 바라보는 물질적 눈이고 또 하나는 내적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心眼]이다. 우리의 고전 소설 심청전에도 심봉사가 눈뜨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이야기 역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사건적으로 심봉사는 눈을 뜨지만 심청의 효성으로 인해 대명천지, 세상이 변한다는 開眼의 메타포로 작용하는 것이다.

개안한다는 건 무지에서 지식으로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영화 혹은 소설의 주제를 이미 암시한 간텍스트(intertext) 고전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 많다. 우선 기원전의 희랍극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 자고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신탁을 무시했다가 그런 지경에 당도한 후 자신의 눈을 빼버린다. 자신의 무지로 인해 진실을 바로 보지 못했던 눈은 더 이상 자신에게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비유는 영화의 주제가 되는 역설인 ‘볼 수 없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교훈을 직시하고 있다. 두 번째는 석가모니의 교훈이다.

금강경에 보면 ‘만약 모든 사물이 사물이 아님을 알진대, 곧 부처를 만나리라(깨달음을 얻으리라 若見諸見非相 卽見如來)’ 금강경의 空사상에 의하면 세상은 다 幻影(maya)이며 그것의 실체 없음을 깨달을 때 진정한 깨달음이 온다는 역설을 비유한다. 불교의 모든 교훈은 다 역설이다. 

그 다음은 성경이다. 예수는 눈과 소경의 비유를 말했다. 소경이 소경을 이끌지 못한다. 누군가 눈뜬 자만이 소경의 무리를 인도할 수 있다. 소경의 상태로 머물러선 안 되고 눈을 떠야 비로소 하느님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다. 이 비유는 원작에 가장 근접한 모티브가 된다. 사라마구는 서구인으로서 다른 어떤 사상보다도 기독교 사상의 비유를 채택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실제로 소경의 무리들과 그들을 이끄는 유일한 눈뜬 자 의사의 아내가 등장한다. 의사의 아내는 주인공이며 동시에 현대의 예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 간텍스트이다. 리어왕은 두 딸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배신당했고 막내딸 코딜리아를 가장 불효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뒤늦게 후회하고 깨우치는 이야기이다. 광야에서 크게 뉘우치면서 리어왕은 비로소 권력이 아닌 인간이 된다. 가시적인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내면의 눈으로 사물을 판단한다는 것이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오게 된다는 역설이 작용한다.
영화의 서사는 황당한 가설로 성립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어느 날 실명되고 오직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라는 가정이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마술적인 상황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것을 그린다. 영화에서 이러한 가정은 현실이다. 한 남자의 눈이 까닭 없이 실명이 되고 이어 모든 사람이 하나씩 실명이 된다. 그러나 안과의사의 아내(줄리언 무어)만 볼 수 있다. 자,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정부는 이들을 격리수용하면서 자신들에게 감염될 소지를 차단하는 조치를 취한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정치적으로 이렇게 나타난다고 작품은 설명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강조하는 주제는 인간의 존엄성 혹은 생명의 외경사상이다. 국가가 이들 감염자들을 격리하고 짐승처럼 학대하고 결국 폐기하는 과정을 보면 비인간적이다 못해 인간이 짐승의 지경으로 하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실감하게 된다. 평소에 우리는 자기가 속한 계급적 관계의 눈으로 인해 인간 이하의 고통에 처한 인간의 삶에 대해 모르고, 또 알아도 모른 척 한다.

이 작품은 그러한 인간존엄성의 격하를고발하고 각성을 촉구한다. 소설에선 가능하지만 영화가 미처 그릴 수 없었던 부분이 있다. 소설에서 의사는 용변을 누러 화장실에 간다. 그 화장실은 맹인들이 어질러놓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화장실일 것이다. 변이 쌓여있고 그걸 밟으면서 가고 미끄러지고 그 위에 자신의 변을 얹어놓는다. 용변을 다 본 후에도 휴지는 찾을 수 없다. 그 악취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명사회에서 의사라는 사회적 지위로 인해 존경받고 스스로 고귀했던 그의 존재는 이 대목에서 박살이 나고 비참해진다.
그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한없이 흐느낀다. 이러한 지위몰락은 앞서 말한 폭풍우 치는 광야에서 흐느끼고 절규하던 리어왕의 신세와 다를 바 없다. 영화에서는 이 대목의 냄새를 운반하기 어려워서 소설만큼 감동적이진 않다.

결국 소경들의 무리들은 어떻게 되는가. 정부에서 박대 받고 버려진 이들은 생존의 싸움을 하게 된다. 그 안에서는 약탈이 일어나고 약육강식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작가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한명의 눈뜬 인간을 통해 야만과 폭력과 이기주의의 시대에 인간성과 도덕과 양심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경들이 이러한 악조건에서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약한 자들이 서로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제는 인간의 조직과 공동체문화, 생명사상에 대해 접근한다. 인간의 삶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조직이어야만 삶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실명하기 전에는 전혀 중시하지 않았던 교훈들이지만 생존의 절대적 순간에 이르러서는 오직 이러한 믿음 외에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사상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들이 난관을 극복하고 희망을 갖게 됐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의사와 의사부인을 중심으로 의사의 환자였던 사람들이 주로 관계를 갖는다.

이들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같은 병원을 다니던 환자들일 뿐이다. 그 사실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인연으로 인해 같이 동고동락을 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섬세한 결론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이 눈을 뜨는 것이라고. 눈을 뜨기 전에 항상 검은 선글라스를 썼던 한 젊은 여자는 애꾸눈 노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 장면은 눈을 뜨기 전에 이미 깨달은 그 여자를 통해 이들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진정 봐야 하는가를 가르쳐준다.

외면의 눈으로만 봤던 당시에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하찮은 노인을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여자의 운명은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인간적 모습인 것이다.
영화와 소설은 구체성에 있어서 차이를 갖고 있고 맛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그 주제는 보편적이다. 소설에서는 인종적 모습에 있어 구체적이지 않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은 백인, 맨 처음 눈이 멀게 된 남편과 아내는 일본인, 애꾸눈 노인은 흑인 등으로 미국적 기반의 다인종적 배합이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그들 인간을 바라보는 이미지로 인해 인류 보편의 이야기라는 확신이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의 가장 마술적인 점 중의 하나인 실명이 되는 순간 세상이 왜 검게 보이지 않고 하얗게 보이는가 하는 점. 소설에서는 우윳빛으로 보인다고 표현하지만 영화만큼은 강렬하지 않다.
영화는 화면 자체가 뿌연 우윳빛으로 보인다. 관객들은 그 점을 기술적 결함처럼 생각해 이상하게 느낄 정도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왜 그런 이미지가 존재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건 영화 속의 소경들이 보는 세상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하얀 화면을 통해 마지막 주인공 의사부인의 눈이 바라보는 하얀 하늘빛처럼 종말을 대하는 인간의 공포와 겸허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섬뜩한 색깔을 유지한다. 백색도시의 빛,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가장 준엄한 문명비판과 인간성 회복에 대한 경고의 색깔인 것이다. 

정재형 동국대·영화이론

필자는 중앙대에서 「영화의 양성성개념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등의 저서와,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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