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2:55 (목)
[學而思] 무엇을 위한 토론인가
[學而思] 무엇을 위한 토론인가
  •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한국사
  • 승인 2008.12.01 15: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한국사
학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토론 문화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국제학술대회니 뭐니해서 명목은 그럴싸하지만 항시 “시간이 부족하다”는 볼멘소리를 하면서 “못 다한 이야기는 이따가 식사 장소에서 하자"며 대충 얼버무려 마치는 경우를 밥 먹듯이 본다.
토론을 달아 놓기는 했지만 시간을 핑계로 대충 넘어가는 토론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심지어는 약정 토론자인 필자에게 30초 안에 질문을 마쳐 달라는 사회자의 권유도 있었다.

금년의 어떤 국제학술대회에서는 종합토론 직전에 사회자가 "질문을 여럿이서 할 터이니이 선생님은 그냥 듣고만 있어 주십시오. 답변하면 시간이 가고 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만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상대방을 꽁꽁 묶어두고 마음대로 주먹을 휘둘러보겠다는 거나 진배없다. 혹은 자신의 토론자를 상대하기 쉬운 '순한 양'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학문적인 역량은 갖추고 있지만 상대에게 쓴 소리를 못하는 양순한 성품의 인사나 자신의 만만한 후배나 자신이 박사논문을 심사했던 이를 토론자로 배정하는 경우들이다. 이런 경우들은 대체로 솜방망이 토론에 그치고 만다.
발표자로서는 현장을 무사히 모면했다고 안도할 수는 있겠지만 발표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토론인 경우가 많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토론하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작년 일이 상기된다. 모 재단 워크숍에서였다. 국가에서 지원한 비용으로 현장을 답사한 결과 보고 자리였다. 필자는 아무개 교수의 토론자였는데, 토론 시간은 한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 갑자기 없던 티타임을 30분이나 정한 데다가, 발표자가 발표 시간을 무려 40분이나 넘기는 통에 실제적인 토론 시간은 5분밖에 배정되지 않았다.

이때 필자는 비감한 어조로 "제가 이렇게 토론자로 온 것은 발표자를 위해서 온 것이고, 또 완성도 높은 논문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해서 인데, 이렇게 토론 시간을 잡아 먹어놓고 5분 안에 마쳐 달라고 하면 도대체 왜 이런 워크숍을 하고, 또 워크숍을 하는 목적이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장내가 숙연해졌다.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토론 시간이 몇 분 더 연장됐지만 그 이후의 일은 코미디 같은 상황이라서 말하지 않겠지만, 한 세상을 공 먹으려는 자들이 많구나 싶었다. 국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했으면 정확한 정산이 이뤄져야 한다.

그 '정산'에 부담을 느끼며 대충 넘어가려는 풍조는 눈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온갖 이유를 대면서 변명하겠지만 구차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종합토론 사회자가 된 것을 마치 큰 권력을 거머쥔 것처럼 행세하며 '재판관'인 양 착각하는 볼썽사나운 장면도 있다. 금년 초에 국가 기관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그 사회자는 자신의 견해와 배치되는 발표자의 논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미국인이나 그 분야와 관련 없는 이들에게까지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답변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학계에서 통일된 견해를 내 놓아야 한다"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었다. 연단에 앉아 있는 인사들이 학계 인사이기는 하지만 학계를 대표하지도 않을 뿐더러 학문은 그 자리에서 담판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인내와 끈기 속에서 학문적 성과나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음은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통일된 견해'를 이 자리에서 당장 내야한다며 그 사회자를 조급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금년 여름에 필자는 학회에 논문을 제출한 바 있다. 심사자 3명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우정 어린 지적으로 인해 좀 더 완성도 높은 논문을 논문집에 게재할 수 있었다.

익명성을 무기로 삼지 않은 논문 평가를 통해 기분이 몹시 상쾌했다. 학회의 토론 문화도 발표자의 논지 전개의 완성도에 도움이 되는 지적을 한다든지, 아니면 치열하게 논쟁을 함으로써 서로가 발전하면서 상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심심찮게 목도되는 장면을 보면서 토론 문화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지 않나 싶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한국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