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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은 버리고 재난은 막아야
환상은 버리고 재난은 막아야
  • 이수훈/경남대·사회학
  • 승인 2002.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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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세평]
‘9·11사태’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치러왔다. 럼스펠드 국방장관 말에 의하면, 이 전쟁은 테러가 종식될 때까지 치러야 할 무한전쟁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미 초토화가 되었고, 빈 라덴의 거취도 이미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전쟁은 아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한반도인들에게 그렇다. 급기야 ‘9·11사태’의 불똥이 한반도로 튀고 있는 것이다.

방한을 2주 앞두고 발표한 연두교서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과 더불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함으로써 한반도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그의 핵심참모들이 모두 나서서 펼치는 파상공세는 가히 충격적이다.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생산 및 수출국으로서 미국의 적이자, 세계평화의 적이라는 것이다.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마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정책으로 폄하되기에 이르렀다. 북미, 남북, 한미 등 제반 관계가 심각하게 꼬여버렸다. 두 적대세력의 중간에 샌드위치 신세인 한국 정부는 전전긍긍 대응이 시원찮다. 정부의 외교력 자체가 미흡한 데다가 그나마 외교를 펼치고자 해도 미국이 전혀 틈을 보이지 않는다. 대화나 협상이 당분간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악의 축’ 발언에는 부시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핵심참모들의 북한관과 대북정책 노선이 선명하게 투사돼 있다. 과거에 북한이 깡패국가이고 악마였다면 이제 그보다 더한 악의 중심축이라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 대한 정책은 당연히 철저한 채찍일 것이다. 악의 축이기에 제거돼야 마땅하다는 해석이 논리적으로 더 맞다. 북한에게 선택은 단 둘뿐이다. 미국에 맞서서 싸우든지, 자신이 완전 무장해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북한은 도저히 미국과 맞서 싸울 힘이 없다. 그렇다고 완전 무장해제하면 자신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평양측은 생각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포용정책에서 붕괴정책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곰곰 따져 보면 클린턴 행정부가 제대로 된 포용정책을 펼쳤다고 볼 수도 없다. 한국정부가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니 훼방을 놓지 않은 정도라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이제 부시행정부는 그런 소극적 개입정책마저 거두어 들이고, 오로지 완력으로 북한을 굴복시키겠다는 자세다. 그 정책의 최종 귀결은 북한의 붕괴인 것이다.

이런 정세는 정확하게 한반도 문제를 1994년 제네바합의 이전 상황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때는 핵무기 문제만 있었지만, 이제는 생화학무기에다 미사일 문제, 그리고 재래식 무기의 철회 등 복잡한 조건들이 첨가돼 있다. 게다가 미국행정부는 예전의 행정부가 아니며, 미국사회 전반도 ‘9·11’ 참사 이후 분위기가 차가울대로 차가워졌다. 남을 포용하고 베풀고 할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북미간의 대화가 한층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국제질서의 패권자임을 자임하고 있는 미국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국제적 문제는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이다. 이것은 비단 부시행정부 들어와서 대두한 문제가 아니다. 1970년대초 이후 미국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온 숙제였다. 그런데 세계적 정황은 미국의 생각과 큰 괴리를 보였다.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통제가 거의 불능상태에 이른 것이다. 대량살상무기의 독점과 그에 따른 쉬운 통제가 아니라 그 정반대가 된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이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왔다. 그런 참에 ‘9.11사태’가 발생했고, 미국에게 고삐를 죌 수 있는 확실한 빌미를 제공해준 것이다.

우리 정부는 그간 ‘한미공조’ 노래로 일관했지 워싱턴의 제반 흐름에 대한 포착 노력과 적절한 대응에 소홀했다. 지금도 당정 관계자들이 사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지 의문스럽다. 북한 역시 변화의 노력에 소홀했다. 평양은 이미 황금같은 기회를 놓쳤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정부의 포용정책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했어야 했다. 미국도 지금과 같은 일방주의를 계속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된다. 전세계적으로 현재 미국이 걷고 있는 노선에 강한 반대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에 이런 긴장고조 상태가 오게 된 데는 3국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책임의 경중에 대해서는 객관적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당장의 사태 수습을 위해서 3국 모두가 자신에 대해 짚어보고 슬기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북한을 몰아 붙여 백기를 들게 해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국가로 만든다는 생각은 필경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반도에 엄청난 재난이다. 환상은 버려야 하고, 재난은 막아야 한다. 대테러전의 확전은 기정사실화돼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북한을 확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과잉이다. 한국 정부는 외교력을 십분 발휘해 파국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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