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9:40 (목)
[문화비평] 强者의 규칙을 깨라
[문화비평] 强者의 규칙을 깨라
  • 이옥순 연세대·인도근대사
  • 승인 2008.11.17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았다면 과연 스스로 철도를 건설하고 근대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까요?” 일제강점기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에는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통치를 당연시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을 가끔 만난다. 10억의 인도인을 자기운명을 개척할 수 없는 무능력자,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피터 팬’으로 여기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인도에도 4년제 대학이 있나요?”라고 질문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인도를 위해서도 좋다!”는 마르크스의 오만한 제국주의시대의 발언을 닮은 그러한 편파적인 인식에는 ‘힘’을 가진 지배자를 신뢰하는 피지배자로서의 아픈 경험이 주는 콤플렉스가 섞여있다. 그것은 강한 제국과의 동일시를 통해 일본의 피지배자로서의 열등감을 잊으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이다.
곧, 유령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스스로 유령 흉내를 내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듯 ‘가해자’인 일본보다 더 강한 가해자의 입장이 돼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 거기에는 일본을 누르고 싶은 진한 욕망이 들어있다.

지난 세기에 우리는 몸은 동양에 있으나 강한 서구세계에 마음을 두며 살아왔다. 지리적으로 지척에 있는 ‘동양’은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서양보다 멀었다. 19세기 일본의 구호인 ‘脫亞入歐’를 잘 실천한 우리에게 세상은 선진한 서양이 중심이고 그 “서양은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타당하다. 그래서 동양보다 더 끌린다.” 우리의 세계사교과서는 서양사로 채워져 있고 비서구세계의 역사는 그 주변부에 불과하다.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가마는 잘 알아도 그보다 먼저 거대한 선단을 끌고 인도양을 가로지른 명나라의 鄭和를 잘 모르는 건 그 결과이다.

2002년 유럽의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과 이창동 감독이 연달아감독상을 받자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제작한 이스트필름의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이 감독의 영화가 베니스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한국 영화가 보편성을 획득한 것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서양을 동경하고 잘 아는 것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것과 비서구적인 것의 열등함을 은유한다는 점에선 문제가 된다, 洋服과 洋屋 등 서양의 것(洋式)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으로 자리를 잡은 우리나라에서 동네의 구멍가게는 ‘슈퍼’가 되고 초록이 하나도 없는 여관도 ‘파크’가 될 수밖에 없다.

보편의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낙후한 동양과 동일시되지 않으려고 점점 다방과 식당을 멀리하고 카페와 레스토랑을 애용한다.
앞서가는 서양을 흠모하고 서양의 방식을 배우며 서양의 거울로 우리를 되돌아보고 개량하는 우리 사회에서 비서구, 발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온 사람들은 홀대를 받게 마련이다. 세계를 정복한 옛날의 칭키스칸을 영웅으로 기리는 책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힘없는 오늘날의 몽골인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동남아나 서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약자라고 푸대접을 받는다.

이런 인식과 행태를 통해 우리는 얼마간 식민주의자와 강자로서의 쾌감을 누린다.
서양의 가치와 규범을 삶의 중심에 두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것을 부정하는 문화적 패배를 의미한다. 문화적으로 서구의 식민지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에서 활약하는 박지성과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박찬호에 대한 과도한 관심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선망하는 선진국에서 인정 받고, 운동에 부적절한 신체를 가진 동양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한 그들에 대한 우리들의 지나친 조명은 그러한 스포츠와 선수들을 가지지 못한 우리가 결국은 열등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 된다. 국내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서 활약하는 외국인(용병)선수들이 그들의 모국에서 유사한 대접을 받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식민주의가 종결된 후에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 진정한 자아를 되찾을 것이라는 사이드와 파농의 전망은 들어맞지 않았다. 총과 칼은 사라져도 지배자의 우월성과 피지배자의 열등함을 강조한 식민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잔존해 과거의 피지배자를 심리적으로 교란하기 때문이다. “강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자는 그 규칙을 깨든지 아니면 사라져야 한다”고 조지 오웰은 말했다. 남을 깔보는 강자의 아류가 되기보다 강자의 규칙을 깨는 것이 진정한 탈식민주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옥순 연세대·인도근대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