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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에서 지상의 삶이 보일까
산꼭대기에서 지상의 삶이 보일까
  • 임옥희 경희대·영문학
  • 승인 2008.11.17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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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태혜숙 지음│울력│2008│328쪽

『탈식민주의 페미니즘』(2000)에서부터 『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2008)에 이르기까지 태혜숙은 한결같이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론 생산에 몰두해왔다. 한 우물만을 고집하기 힘든 우리사회에서 저자가 보여준 지칠 줄 모르는 지적 열정은 감탄할만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빨리빨리즘은 학문영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학문영역에서 속도전의 전형은 프로젝트용 지식생산이다. 하지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느린 호흡의 학문들이 속도전에 말려들다보면 자급적, 자생적 지식생산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국내이론시장은 서구의 지식상품을 신속하게 수입해 학문시장에 내놓기 무섭게 또 다른 지적 유행에 편승하고 있으며, 그것이 지적경쟁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처럼 ‘식민화’된 지식시장에서 일관되게 자기만의 ‘탈’식민주의 이론작업을 해왔던 저자는 그런 노력의 결과물을 『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로 내놓았다. 무엇보다도 『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라는 거창한 제목은 저자가 어떤 여성주의 이론화작업을 염두에 둔 것인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대항지구화란 무슨 의미인가. ‘아시아’에 따옴표를 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 사이에 있는 ‘와’는 어떤 의미인가.
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가 등가치라는 것일까.

이 양자를 매개하는 ‘와’의 정치적 젠더주체가 아시아 여성이라는 말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는 과정이 이 저서의 이론적 핵심이다.
우선 대항지구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다시피, 反세계화 운동은 이미 세계화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화를 합법화, 정당화하는 논리와 공모하기 십상이다. 전지구화를 내파하는 변혁의 힘이란 단지 反지구화, 反세계화 차원이 아니라 ‘행성의 지평’을 사유함으로써, 지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도록’ 하는 차원, 그것이 대항지구화다.

저자가 대항지구화라는 개념을 등장시킨 것은 전지구화 시대에 여성문제의 해결이 그만큼 힘들다는 은유로 읽힌다. 월러스틴의 말대로 열국자본주의 시대에 여성이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억압을 단지 일국 차원의 젠더/계급/인종과 같은 고전적인 범주로는 더 이상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로컬에 속해 있는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젠더/섹슈얼리티/계급/노동/자본/자연 등의 범주들은 외연을 점점 넓혀나가 인종/민족/국가/아시아/지구를 포괄하는 나선형 회오리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을 중심으로 중첩된 억압의 고리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면 지구바깥의 한 지점으로까지 비상해야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처럼 엄청난 대항지구화를 실천할 수 있는 행위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저자에 따르면 대항지구화의 실천행위자는 젠더화된 하위주체다. 하위여성주체는 민주주의라는 코드에 기초한 좌파남성지식인들이 거론하는 ‘민중-시민-사회적 소수자-다중’같이 탈젠더화된 실천주체와는 다르다. 저자가 염두에 둔 하위여성주체는 지구의 남쪽 토착 원주민 유색여성들, 즉 ‘서구중심 제국주의적 근대성에 아직 포획되지 않은’ 여성들을 말한다. 그런 여성범주에 ‘아시아’ 하위여성주체도 포함되는 셈이다. 이때 따옴표 ‘아시아’는 (동)아시아가 하나의 블록이 돼 서구에 대항하려는 아시아우월주의에 내재한 남성엘리트지식인들의 욕망을 행여 여성주의자들도 욕망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비판을 염두에 두고 그런 욕망과 거리를 두려는 의지적 표현이다.대항지구화가 가능하려면 지구를 변혁시킬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와 받침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거시적 관점으로는 지상의 빈곤한 자들의 미시적 삶을 포착하기 어렵다. 그리해 지구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여신의 관점에서 낙하해 변혁의 받침점으로 발 디딘 곳이 케냐의 마라구아이다.

마라구아 원주민 여성들은 전지구화 시대의 글로벌 거버넌스와 같은 초국가적 정치기구들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그런 기구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그들의 자급적 자율적인 삶이 산산 조각나는 비극적 순간이다. 초국적 자본은 로컬의 자급적 자율적 삶을 철저히 파괴하고 강제된 선택으로서 소비자 역할 이외의 것은 허락지 않기 때문이다.

마라구아는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에서 조금 떨어진 커피 재배 지역이었다. 마라구아 여성들은 환금작물인 커피를 단일 재배함으로써 식량자급을 위한 다른 농작물을 키울 수가 없었다. 커피열매를 따는 일과 자녀를 돌보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지만 그런 노동에 대한 임금은 집안의 남성들에게 지불됐다.

케냐에서 커피생산은 소작농들에게는 괜찮은 수입을 가져다주었고, 국가에는 상당한 외화를 안겨주었다.하지만 마라구아 여성들은 더 이상 커피생산에 일조하지 않겠다면서 들고 일어났다. 집안의 여자와 아이들이 커피콩을 따는 동안 남자들은 술집에서 흥청거렸다. 아무리 일해도 자신과 자기 아이들마저 거둬 먹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마라구아 여자들은 커피나무 아래 콩을 심어(이것은 금지된 행동이었다) 아이들에게 먹거리를 마련해주고 커피나무를 뽑아서 땔감으로 이용했다.

이로 인해 커피생산량은 급격히 떨어졌고 케냐는 국가부도위기에 처했다. IMF와 같은 세계기구들은 케냐의 커피농장에 투자한 주식과 펀드의 폭락을 방지하려고 악명 높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들어갔다. IMF의 구조조정 결과 케냐여성들에게 중요한 보건, 의료, 교육과 같은 사회복지비용은 당연하다는 듯이 삭감됐다. 메트로폴리스의 ‘커피 빈’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인터넷을 이용해 케냐의 커피콩에 투자하고 있는 백인여성과 마라구아 원주민 유색여성의 땀은 이런 식으로 연결돼 있었다. 마라구아 여성들의 저항은 겹겹의 착취, 즉 가부장적인 남편의 착취, 단일작물경작에 의한 자연의 착취, 외화벌이를 위한 국가의 착취, 초국가적 자본의 착취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급할 수 있는 콩과 지역시장에서 손쉽게 교환할 수 있는 과일을 심는 것으로 커피농장을 바꿔나갔다. 그 결과 마라구아지역은 가난하지만 자급할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을 회복했다.
이 투쟁과정에서 마라구아 여성들의 저항은 일당독재정부였던 케냐에 야당이 만들어지는 동력을 제공했다.   

마라구아 여성들의 사례가 보여주다시피, 이 저서는 최종심급화 돼있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위주체의 목소리를 이론화하고 있다. 서구를 중심으로 하는 식민화된 문화적 위계질서를 풀어내고, 노동/자연/자본이라는 다양한 동심원들을 젠더의 관점으로 번역해 수평적으로 펼쳐내는 것, 그것이 이 저서를 관통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하지만 원의 곡률을 펼쳐서 네모로 만들려면 그 곡률만큼의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마치 후렴구처럼 따라다니는 ‘이로써’ 여성문제는 인종/민족/계급/자본을 넘어 대항지구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무의미한 발언을 해결책처럼 덧붙이게 된다. 전지구촌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극도로 추상화된 이론은 모든 문제를 설명해주지만 구체적인 어떤 문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기 위해 소용돌이의 꼭대기로까지 비상해야 한다면 그런 아득한 높이에서 과연 생존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성들의 삶이 보이기나 할까. 하위여성주체들을 전경화하려는 이론에 대한 욕망은 그들의 목소리를 재현함으로써 침묵시키는 아이러니에 빠질 수도 있고, 예이츠의 시 ‘재림’에서처럼 이론가라는 송골매가 너무 높이 나는 바람에 지상의 고단한 하위여성주체를 비가시화시키는 맹목에 빠질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대항지구화와 ‘아시아’ 여성주의』는 이론이라기보다 시로 읽힌다.

하지만 이론으로서의 실패 지점이 미래에 대한 녹색 비전과 원거리시학을 제시한다는 점은 이 저서의 매력일 수도 있다.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비상하는 이론가의 이론이 아니라 추락하는 시인의 상상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옥희 경희대·영문학

필자는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위기의 몸』이 논문으로는 「여/성이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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