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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방 철학자의 足脫不及
어느 지방 철학자의 足脫不及
  • 이왕주 서평위원/부산대·윤리교육
  • 승인 2008.11.0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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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_『동무론』을 읽고

서기 3000년에 철학이 하나의 學으로서 살아남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리라. 내가 아는 여러 대학의 철학과가 사라졌고, 학과교수들은 교양학부 또는 그 정식 명칭을 정확히 기억하기 어려운 긴 이름의 학제적 학과로 옮겼거나 아예 그만 두었거나 했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적어도 공교육 체제 안에서 대부분 대학의 철학과는 지금 존폐라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힘겨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손익 계산의 자본제적 방식을 수정하지 않는 한 이 위기가 개선될 가망은 없어 보인다. 겨우 다섯 명의 학생이 등록해 다섯 명의 교수들로부터 강의를 듣게 되는 학과에 미련을 갖는 사립대학은 없을 테니까.
어쨌든 나는 서기 5000년에도 철학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기를 간절히 원한다. 무한 경쟁의 논리와 채산성의 척도만을 고집하는 대학들이야 절망 자체지만 철학의 실천 현장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철학자들은 그래도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을 준다.

철학자 김영민. 일찍부터 사유의 독창성과 깊이,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神異한 개념과 정채로운 논리에서 이미 족탈불급의 경지를 열어왔던 그는 누가 뭐래도 한국 현대 철학의 가장 자랑스러운 자산 중 하나다. 만일 철학이 후대에도 살아남는다면 단언컨대 철학사가들은 21세기 한국 철학의 벽두를 김영민, 이 이름으로 장식할 것이다. 아직 그의 사상은 생성, 조형 중에 있어 그 전체상의 윤곽을 그려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철학이 이 시대의 지배담론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적 파고를 너끈히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실천력을 담보하고 있는 창조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그가 최근에 출간한 『동무론』(한겨레 출판, 2008)은 그동안 다양한 채널로 소통을 모색해왔던 사유체계의 중간 결산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저서다. 오래 천착해왔던 그의 사상의 중핵 개념들, 이를테면 동무, 공부, 좋은 버릇, 현명한 지배, 현명한 복종, 부재의 사치 등이 신묘한 언어들로 주설되고 인문연대의 실천전략들이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무란 무엇인가.

그는 이 물음으로써 부모, 자식, 친구, 애인, 상사, 수하, 동료 등등으로 작동하는 관계 분류표의 정당성에 계보학적 이의를 제기한다. ‘풍경은 기원을 은폐한다’는 그의 명제 또한 이러한 분류표의 작동 방식에서의 사실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를 명증하게 변별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양식은 어쨌든 오랫동안 이런 분류표에 의해 규율돼 왔다. 가령 예기치 않은 공간에서 낯선 타자와 우연히 만나서 서로를 살피고 예단하고 대화하고 처신할 때, 습관적으로 먼저 작동하는 평가 항목은 버릇이 아니라 노릇이다. 요컨대, ‘너는 누구냐’ 라는 물음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그가 지속적으로 분비하는 다양한 버릇들을 노릇의 위계 아래 배치시켜나간다.

이렇게 해서 버릇은 오직 노릇의 성좌 어딘가에 위치지어 질뿐이다. 물론 권력은 이 배치선을 따라 작동한다. 이 배치선의 축적으로 귀납된 역사의 현상태가 자본제다. 철학자 김영민이 소묘하는 인문연대의 공동체에서 현명한 복종, 현명한 지배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복종과 지배를 재맥락화하는 이런 논의에서 그의 동무론은 푸코의 계보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끌어들인다. 김영민에 따르면 복종과 지배가 정당화될 수 있는 최종심급은 자발성이나 호혜성이 아니라 연대성이다. 이 말은 보충이 필요하다. 여기서 연대는 게마인샤프트나 게젤샤프트의 방식으로 링크되는 인간관계의 결속력이 아니라 좋은 몸, 좋은 버릇의 磁性에서 생성되는 벡터량을 의미한다.

요컨대 동무는 친구도 연인도 벗도 동지도 친지도 아니다. ‘아니다’가 겨냥하는 것은 분류표로 배치되는 관계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본제적 삶의 양식이 개체에게 부과하는 모든 구조들이다.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던지는 그의 선전포고가 단호한 급진성을 띌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그의 사상이 어떻게 진화해갈지 우리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실천파일을 탑재한 그의 철학은 현재 한국 수준의 성취만으로도 오늘날 인문학계의 가장 빛나는 독창적 패러다임으로 평가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Cogitamus는 ‘우리는 생각한다’라는 라틴어로 책을 통해 시대의 좌표를 읽는다는 교수신문의 취지를 담고 있는 고정 칼럼입니다.

이왕주 서평위원/부산대·윤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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