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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정신일도 인사불성
[문화비평] 정신일도 인사불성
  • 조환규 부산대·컴퓨터공학
  • 승인 2008.11.03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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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 정도는 아니지만 필자 역시 종교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다. 그것은 개인적 경험이 편견으로 퇴화된 것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국민학교 소풍으로 간 절에서 필자는 금시계를 찬 스님 때문에 놀란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 번쩍이는 금시계의 스님은 무협영화 속에 보아온 소림사 풍의 도인과는 많이 달랐나 보다. 종교와의 두 번째 만남은 약간 악연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추첨을 통해 개신교 재단의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초여름에 열리는 중생회. 그것은 모든 학생들을 상대로 삼일 동안 계속되는 부흥회의 변주곡. 땡볕이 내리쬐는 초여름 운동장에 아이들은 줄을 맞춰 앉아야 한다. 그러면 귀하게 모셔온 유명 목사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폭탄같이 뿌려지면서 중생회는 한껏 달구어 진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가 지옥의 유황불에 살을 태우며 울부짖을 때…”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면 몇 친구들은 미리 준비해둔 가마멍석에 엎어져 흐느끼기도 한다. 역사적 당위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혹세무민의 세계관이 종교 행사를 빙자해 협박 수준으로 강요되는 것이다. 그것도 조무래기 중학생을 상대로. 그러나 엄숙한 예배의 와중에도 장난을 치다 선생님께 끌려가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필자를 비롯해지옥행 열차 학생할인권을 예약한 악동들이 그들이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인지 수준에 맞는 내용과 형식의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어른이 되면 도움이 된다고 해서 중학생들에게 ‘초절정 섹스 테크닉-고급편’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독실한 종교인들이 보여주는 정신일도의 경지를 항상 부러워한다. 종교적 성인들이 보여주는 헌신과 무한한 인내,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에는 우리같은 필부는 죽어도 따라갈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한 정신일도의 경지는 신념을 극한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의 무장 독립운동가도 종교적 성인에 뒤지지 않는 분이라 생각한다.

새큰거리며 잠자는 핏덩이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바람같이 만주로 떠나는 결단은 정신일도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또한 초절정의 음악가들이 보여주는 신들린 연주는 정신일도의 세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히틀러와 본 회퍼의 신념적 경지가 같다고 해서 그 가치가 동일시 될 수 없듯이, 정신일도의 세계에도 가치의 차별이 있고, 선악이 있다. 정신일도 상태에서의 지극한 신념은 때론 매우 위험한 현실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공화당의 페일린 여사는 “신께서 우리의 군대를 이라크로 보냈다”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했다. 십자군 전쟁의 재래인가, 정말 등골 오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종교적 신념과 세속의 지식이  뒤죽박죽인 사람의 문제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하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페일린의 말은 마치 “오빠, 우리 그만 헤어져. 어제 기도에서 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 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싶다. 페일린을 이르러 무지(ignorance)와 확신(confidence)의 결합체라고 했듯이, 과학을 비롯한 세속의 지식과 질서를 무시하는 종교적 확신은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동성애자들이란 길거리에서 그냥 마구 죽여도 되는 인종이라고 믿는 종교인이 있다면 경전만 뒤지지 말고, 현대 분자생물학이 이들을 어떻게 변호하는지도 한번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 

새 정부 이후, 특정 종파의 활약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 한 종교단체는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규 생물교과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작금의 교과서 전쟁에 이 달갑잖은 용병까지 등장하니, 이 전쟁의 끝이 어떻게 마감될지 참으로 걱정이 된다. 한편, 대운하 완공을 무슨 성지수복 차원의 운동으로 인식하는 인사불성의 단체도 있는데, 그들은 무지와 확신이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공인의 신분을 망각해 신정국가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보안법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환율 안정화를 위한 구국 대기도회’로는 결코 환율을 잡을 수 없다. 또한 그러한 시도는 올바른 해결을 위한 기회까지 소멸시켜버리기 때문에 그 폐해는 막심하며 길어진다. 따라서 고고한 정신일도 상태를 자랑하고픈 사람이라면, 이웃들에게 자신이 인사불성의 상태가 아닌지를 끊임없이 항상 되물어 봐야 할 것이다. ‘섬기지’ 말고 겸손하게 ‘물어 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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