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3:30 (목)
취지 좋았으나 포사이드 안무, 냉혹한 금속미 표현하지 못했다
취지 좋았으나 포사이드 안무, 냉혹한 금속미 표현하지 못했다
  • 장인주 무용 칼럼니스트
  • 승인 2008.11.03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 유니버설발레단 ‘모던발레프로젝트’(10.17~19)

모던발레의 거장 한스 반 마넨의 코믹발레 ‘블랙 케이크’로 막을 연 유니버설발레단의 ‘모던발레 프로젝트’(10.17~19. LG아트센터)는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쉬운 발레를 보여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관객의 웃음보를 자극했다. 무거운 소재와 어려운 내용은 버리고, 쉽고 편안한 주제의 소품 세편으로 관객과의 진솔한 소통을 시도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984년 창립한 한국최초의 민간직업발레단이다. 한국문화재단의 전폭적 지원 하에 발레계의 유학1세대와 해외객원무용수 등의 활약으로 창단초기부터 직업발레단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1962년 창단해 걸음마하던 국립발레단에 비해 월등히 나은 무대를 선보였고, 국립발레단이 하지 못한 뉴욕 링컨센터 공연, 2003년 파리무대 입성 등으로 해외에서도 그 역량을 인정받으면서 단기간에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국립발레단이 지난 10년 동안 성큼 따라잡아 동등한 수준의 무대를 선보이기까지 유니버설발레단은 한국발레를 대표하는 자존심을 굳건히 지켜왔다.

사진 제공 : 유니버설발레단

그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발레의 전통을 계승한 고전발레 레퍼토리확립과 ‘심청’이라는 민족발레의 탄생에 있었다. 러시아 키로프발레단 예술감독을 지낸 올레그 비노그라도프를 예술감독으로 초대해 발레의 교과서격인 고전발레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물론 러시아발레는 올드패션임에는 틀림없다.

키로프발레단의 ‘지젤’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공연되고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러시아의 고전발레는 전 세계적으로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당에 유니버설발레단이 이를 계승한 것은 세계적 발레단으로 인정받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숙제를 풀면서 정통 발레단으로서의 역량을 배양하기 위함이었다. 여성무용수가 강세인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이러한 과제를 잘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아무리 훌륭한 테크닉과 무대를 연출한다고 해도 서양의 정신이 담긴 작품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될 수 없듯 세계무대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한국의 정서가 담긴 새로운 발레를 창작해야했다.
초대 예술감독을 지낸 애드리언 댈러스는 전래소설 ‘심청’을 원전으로 한복입은 발레리나를 탄생시켰다. 창단 2년만의 성과였고, 고전발레의 틀에 한국적 색채를 입힌 ‘심청’은 이제 성년을 훌쩍 넘겨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발레로 자리 잡았다.

‘심청’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적 소재를 다룬 ‘춘향’(2007년 초연)은 수정을 거듭하며 완성도를 높이며 거듭나고 있다. 이렇듯 러시아고전과 민족발레라는 두 가지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해온 유니버설발레단이 세계 유수발레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넘어야할 산은 또 있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발레단의 1년 프로그램 구성을 보면 대부분 고전발레는 한두 편이고 그 외엔 모던발레를 공연한다. 3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 뉴욕시티발레단,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등도 고전과 현대의 절충선상에서 전통을 지켜오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모던발레는 발레단의 명성과도 직결되는 메인프로그램이다.  이리 킬리안의 네덜란드댄스시어터, 존 뉴마이어의 함부르크발레단, 마츠 에크의 쿨베리 발레단, 윌리엄 포사이드의 프랑크푸르트발레단 등  발레단 이름 앞에 안무가의 이름을 내거는 이유도 현존하는 유명안무가의 성향에 따라 정체성을 찾아가는 발레단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

이렇듯 발레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모던발레를 공략하는 전략을 유니버설 발레단도 따랐다. 1986년을 시작으로 2000년대 들어서면서 집중적으로 나초 두아토, 하인츠 슈푀얼리, 오하드 나하린 등 세계 유명안무가의 색다른 모던발레를 수입했는데, 일부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잘 소화해 내기도 했다. 또한 모던발레를 전문으로 공연하는 소규모의 부설단체 UBCII를 설립해, 국내안무가의 작품을 주로 공연하면서 발레의 대중화에 주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전과 현대, 전통과 창작이라는 두 가지 면모를 모두 갖췄다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도 없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번 ‘모던발레 프로젝트’는  개성이 뚜렷한 모던발레계의 걸작소품 세편을 한 무대에 올림으로써 국제적 조류에 편승하면서 한국현실에 맞는 바람직한 비전을 제시했다. 모던발레 중에서도 소품을 선택하고, 코믹성을 강조함으로써 대중 속으로 성큼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코믹발레 두 편과 그 사이에 모던발레계의 전설적 작품인 포사이드의 작품을 보여주는 구성은 탁월했다. 그러나 완성도면에서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10월 19일 공연관람). 우선 ‘블랙 케이크’에서는 무용수들의 연기력이 부족했다. 도입부 무도장면에서 상류사회의 스노비즘이 부각되지 못하면서 술에 취해 무너지는 허상이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특히 술에 취해가는 중간과정이 부족한 탓에 만취한 장면으로 훌쩍 건너뛰는 느낌을 주었다.

토슈즈 대신 하이힐을 신은 여자무용수들이 차이코프스키, 마스네의 음악에 맞춰 추는 사교무용과 발레의 하체움직임의 조화는 테크닉 면에서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안무가 한스 반 마넨이 직접 방한했음에도 무용수들이 가식과 진솔의 경계를 잘 보여주지 못했다. 아마 모던발레의 특성인 자기표현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객석에서 폭소가 터져나와야하는 부분에서 밋밋하게 넘어가면서, 코믹발레 특유의 여유와 공감을 만들어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

‘블랙 케이크’에 비하면 피날레작 크리스토퍼 휠든의 ‘바리아시옹 세리외즈(부제: 백스테이지 스토리)’는 2005년 초연이후 두 번째 무대인만큼 무용수의 표현력이 잘 드러났다. 휠든은 프로시니엄무대를 직각으로, 왼쪽방향으로 돌려 실제 관객이 무대 옆면을 지켜보게 하는 놀라운 발상을 했다. 공연준비과정을 통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통해 우아함에 가려진 이기적인 발레리나의 이중적 성격을 코믹하게 다뤘다. 가벼우면서도 결코 표현하기 쉽지 않은 드라마 한편을 제대로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세 편 중 제일 아쉬움이 큰 작품은 포사이드의 ‘약간 높은 곳 중간에’였다. 포사이드의 가장 두드러진 안무특성은 신체균형을 가능케 하는 회전축의 변형이다.

거의 쓰러질 것만 같은 각도로 발끝으로, 빠른 속도로 도는 발레리나를 보면서, 최대한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인상을 관객에게 줘야한다. 그러면서 높은 도약, 자유로운 이동, 도발적 근육의 긴장이 일어나고 최대한 감정이 절제된 상태에서 광적인 감정이 발산되는 매우 비순리적인 움직임을 연출해야한다. 흔들리는 뗏목위의 방추형 인간을 연출하는 무용수들의 남다른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포사이드 안무의 매력이다. 그런데 바로 이 중요한 동작특성이 제대로 묻어나지 않았다.

포사이드 안무의 가장 대표적인 아름다움 즉 세련미가 결여된 냉혹한 금속미는 건조해야할 부분에서 오히려 끈적였고, 유연해야할 부분에서 맥이 끊어져있었다. 민첩성이나 섬세함 등을 통해 보완했다면 훨씬 더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포사이드의 ‘약간 높은 곳 중간에’를 레퍼토리로 도입한 유니버설 발레단은 비로소 모던발레계에서 가장 표현하기 어렵다는 구조주의 기교를 경험한 셈이다. 비록 완성도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이는 해를 거듭하며 보완될 것이다.

장인주 무용 칼럼니스트

필자는 파리1대학에서 무용미학 D.E.A.학위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무용이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객석>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