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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의 ‘주리·주기’에 기반한 접근, 동의할 수 없다
다카하시의 ‘주리·주기’에 기반한 접근, 동의할 수 없다
  • 최영진 성균관대·한국철학
  • 승인 2008.11.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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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유학론을 비판한다

『왜 조선유학인가』 한형조 지음│문학동네│2008

『조선유학의 거장들』 한형조 지음│문학동네│2008

한형조 교수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한 교수의 현란한 수식과 은유, 그리고 단문으로 구성된 파격적 문투는 유학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준다. 최근에 출간된 두 권의 저서는 한 교수의 글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수작임에 틀림없다. 특히 「태극도설」 번역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일품이다.


저자는 ‘조선은 왜 멸망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주자학·서학·실학 등이 가로 세로로 얽힌 조선유학사의 실타래들을 한칼에 잘라 준다. 그리고  퇴계·율곡·다산·혜강 등 조선유학 최고수들이 구축한 사상의 속살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 책들에 의해 조선유학은 새로운 빛깔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전문적인 학술서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眞劍勝負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논쟁적 비평’이라는 편집지침에 가급적 충실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학술적 성격이 강한 부분을 중심으로 나의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한 교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한 교수와 나는 조선유학사상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한 교수가 실학에는 ‘주자학적 전통과의 연속과 단절’이라는 양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 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理와 氣의 개념, 四端七情論爭과 湖洛論爭 등 각론에 있어서 나는 저자인 한 교수와 견해를 달리한다.

무엇보다 먼저, 한 교수가 唯理·唯氣·主理·主氣·氣學이라는 유형으로 조선유학의 지형도를 그린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유형들은 다까하시가 설정한 ‘주리/주기’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한 교수는 ‘유기의 사고’를 다음 같이 설명한다. “자연은 그 감응의 기틀을 통해 우주적 덕성을 실현해 나간다. 이 과정은 완벽하다. 인간 또한 그러하다. …유기의 사고는 그래서 理를 따로 요청하지 않는다(『왜 조선유학인가』344쪽).” 유기론은 글자 그대로 기만을 인정하는 이론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유기론자의 대표적 학자로 저자가 지목한 화담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리 하나면 공허하고 기 하나면 조악하니 합하면 묘하고 묘하다(「原理氣」).” 화담은 리를 요청하고 있다. 기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화담은 리를 ‘기의 주재자(氣之宰)’로 본다. 물론 이것이 외재하는 실체의 물리적 주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화담은 리와 기의 공간적 분리, 리의 시간적 선재성은 부정하였으나(氣外無理. 理不善於氣) 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까하시가 ‘주기학설의 절정’으로 규정했고 한 교수가 유기론자로 분류한 임성주는 “元氣는 리에 근거한다”라고 하고 선언했으며 “이기를 논하면 반드시 理氣同實 心性一致로서 종지를 삼아야 한다”라고 해 리와 기는 동일하게 ‘실’하며, 심=기와 성=리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理氣同實 心性一致’는 본래 저자가 주리론자로 분류한 巍巖 李柬 학설의 핵심이다. 저자의 지형도에 의한다면 유기론자와 그 반대 진영에 속하는 주리론자가 동일한 명제를 종지로 삼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또한 한 교수는 “南塘은 기의 현실성에 주목했고, 巍巖은 리의 초월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라고 보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리론자 외암은 리가 기에 의해 규정을 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에 기의 현실성에 주목한 것이 된다(주기론). 한 교수가 외암은 “리가 이에 의해 피동적으로 제약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주장한 것과 정반대로 “기가 악하면 리도 악해진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한 교수는 “다산은 주기적 전통과는 깊이 절연했으되 주리적 전통의 유산에는 크게 빚지고 있다”라고 주장했으나, 다산의 인성물성론은 주기론자로 분류한 남당의 인물성이론과 동일한 논법을 바탕으로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한 교수가 조선유학을 읽는 기본 코드로 설정한 유형들이 조선유학사에 실제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한 교수는 “리에 물리적 적극적 활동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통틀어 主理라고 한다”고 주리의 개념을 정의한다. 충격적인 발언이다.
이 주장에 의한다면 리는‘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활동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리는 물리적(physical) 존재, 곧 형이하자이다. 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리해  주리론자들은‘리=형이상자, 기=형이하자(理也者 形而上之道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朱子大全』권 58 「答黃道夫」)’라는 성리학(주자학)의 체계를 무너뜨린 학자들이 된다. 이러한 학자들이 조선 시대에 실재했을까. 대표적 주리론자라고 하는 퇴계는 ‘리가 발한다(理發)’, ‘리가 움직인다(理動)’, ‘리가 이른다(理到)’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발한다’, ‘움직인다’, ‘이른다’라고 하는 용어들은 일반적으로 현상계 사물들의‘물리적 작용’을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므로 ‘리에는 물리적 활동력이 있다’라고 오인할 수 있다. 人物性同異論에  대한  한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 우선 “조선유학의 2대 논쟁은 …사단칠정론쟁과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인물성동이론이다”이라는 문장에서 ‘인물성동이론’은 ‘호락논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물성동이론(인간과 동물 ·식물 등 物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이론)은 호락논쟁의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호락논쟁의 핵심적  쟁점은 ‘未發論’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성은 기질지성일 뿐이다. 이것이 남당의 主眼이다”라는 주장,  “남당은 ‘天命之謂性을 기질지성으로 읽었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견을 가지고 있다. 남당/외암의 논쟁이 발생한 것은 이 두 학자들의 이론이 주자학의 기본문법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당은 성론에서, 외암은 심론에서 각각 주자학의 문법체계 내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이론을 주장했다. 이 점은 퇴계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중국의 주자학과 구별되는 조선성리학의 독자성을 모색할 수 있다. 

주자학에서 ‘같음(同 보편)’은 리의 세계이며, ‘다름(異 특수)’은 기의 세계다. 그런데 남당은 ‘다름’의 근거를 리의 세계에서 정초하려고  했으며, 외암은 ‘같음’을 리의 세계와 아울러 기의 세계에서  확보하려했다.  한 교수의 주장과 같이, 남당이 ‘다르다’라고 말한 바의 그 성이 기질지성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기질지성은 원래 개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식이다.
문제는 본연성이 다르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본연지성은 리이고 리는 본래 우주적 본편성을 갖는다.  하지만 남당이 말하는 성은 이와 다르다. 그는 ‘因氣質’의 성, 곧 기질에 ‘因’한 성이 진정한  의미의 본연지성이라고 보았다.

‘天命之謂性(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고 한다)’의 성은  기질지성이 아니라 바로  이 본연지성이다.‘인기질’했기 때문에  인간과 소와 말의 본연지성은 다르다. 그러나 ‘雜氣質’ 곧  기질과 실제적으로 섞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종 내부, 소라는 종 내부에서는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이 남당 이론의 핵심이다.  한  교수는 남당이 “리는 기에 의해 실질적인 제약과 제한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라고 보았으나, 이 리는 ‘잡기한’한 기질지성이지,  본연지성은 아니다. 이와 같은 남당의 인물성이론은 주자학의 이론 체계 내에서 정당화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리와 기는 분리되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離而不雜)’라는  이분법을 기본으로 하는데 남당은 ‘超形氣 · 인기질 · 잡기질’이라는 삼분법을 사용하고 있다. ‘ 초형기’는 ‘부잡’, ‘잡기질’은 ‘불리’에 해당한다. 하지만 ‘인기질’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한 교수가 “남당은 지금 주자학의 금기를 아슬아슬하게 밟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마지막으로, “성호 이익은 … 식욕과 성욕을 극단적으로 혐오했다. …일상적 정서와 욕구는 악덕으로 배제됐다”라는 주장을  검토해 보자.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성호는 유학자가 아니다. 유학의  정체성은 ‘금욕’이 아니라 ‘절욕’을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중용』에서 ‘일상적  정서인 희로애락이 발동해 절도에 맞는 것이 和이며, 이것은 천하의 보편적 도(達道)이다’라고  했다. 『성호사설』 「인사문」의 ‘색욕’편을 보면, 성호가  인간의 성적 욕구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淫欲’을   혹독하게 비판한 점은 확인된다. ‘욕’편에서도 ‘사치한 마음(侈心)’, ‘富貴之欲’을 비판했다.  이것들은 생리적 욕구 곧 ‘人心’ 이 지나쳐서 ‘人慾’으로 타락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생리적 욕구는 위태롭다(人心惟危) ’라는 성리학의 기본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강도가 다를 뿐이다.  성호가 ‘생리적 욕구를 혐오하고 일상적 정서를 악덕으로 배제했다’고 말할 수 있는  논거가 무엇인지  한 교수의 가르침을 청한다.
이밖에도 퇴계를 정치 참여에 부정적인 개인주의자로 본 것이나, 기학에 대한 이해 등에서도 나는 생각이 다르다.  한 교수와 강호제현의 질정을 부탁한다.

 

최영진 성균관대·한국철학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현대와 유교』등의 저서와 「한국사회의 유교적 전통과 가족주의」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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