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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출판번역, 이것이 문제이다
[기고] 출판번역, 이것이 문제이다
  • 교수신문
  • 승인 2002.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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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8 15:54:35

이종영 / 진보평론 편집위원

내가 그 활동을 주시하고 있는 기 라르드로(Guy Lardreau)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변증법을 현실에 대한 실재의 분노로 정의한다. 그리고 또 현실을 실재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유물론이라고 한 뒤, 유일한 유물론자는 플라톤이라고 한다. 플라톤이야말로 실재로부터 현실을 설명하려는 입장을 취했으므로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책의 자본주의적 현실은 책의 플라톤적 ‘이데아’에 대해 변증법적 관계를 구성한다. 즉, 책의 ‘이데아’에 비춰본 책의 현실이 종종 분노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예전에 책과 관련해 들었던 의문 하나는, 각고의 노력으로 쓰여진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시간과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고 쓰여진 상업적 저서와 어떻게 동일한 가격으로 팔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맑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정하는 이러한 사실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헤겔의 책을 싼 가격으로 살 수 있으므로 말이다.

반면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종속된다는 맑스의 지적은 자본주의적 출판시장에서 그 진가를 여실히 발휘한다. 이제 책도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하여 책의 교환가치만을 노리는 상업적 출판사들의 틈새에서 사용가치를 위한 책을 출판하려는 진정한 출판사들은 고전을 면할 수 없다. 희망은 출판상품의 소비자인 독자들의 주체적 조건에 달려 있지만, 그 조건 또한 상업적 출판사들의 문화산업적 공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게다가 그러한 자본주의적 현실을 비판하는 책들도 또한 교환가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려는 자들의 윤리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동문선 刊)도 한국에서 같은 운명에 처한 것 같다. 나는 작은 보석과도 같은 이 책을 번역하여 출판사에 가져다준 후 거의 2년만에 책방의 신간코너에서 발견하고 몹시 놀랬다. 나에게 교정을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편집부에서 자의적으로 수정한 내용들이었다. 프랑스에서 인권의 윤리가 지니는 허구성을 비판한 소단원의 표제인 ‘인권의 윤리의 토대들’이 ‘인권의 윤리적 토대들’로, ‘죽음의 서양적 정복’이 ‘죽음의 서약적 정복’으로(한 군데 오타를 보고 제대로 된 부분들을 수정한 경우), ‘과학’이 ‘학문’으로 바뀐 것이 그 작은 예들이다. 또 출판사에서는 옮긴이의 허락도 없이 ‘인물약전’이란 것을 뒤에 추가했다. ‘엔싸이클로페디아 브리태니커’를 보고 그 ‘인물약전’을 작성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그 출처는 밝혀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건 이런 과정 중에 옮긴이와 한번의 대화도 없었다. 이처럼 번역자의 의사에 대한 존중이 실종된 것은 번역자들 또한 자본주의적 상품화에 순응하여 자기주장을 잃어버려서일까.

출판사 측에서는 ‘실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실수가 벌어질 수 있음이 놀랍다. 결국 10여일 정도 책방에서 판매된 이후 잘못된 책은 부분적으로 회수 처리되고, 내가 급히 서둘러 교정을 본 새로운 책이 다시 출간됐다. ‘인물약전’이 뒷부분에 수록된 잘못된 책은 대형서점이나 동문선 출판사에서 교환해주기로 결말을 지었다. 그러나 오자 한 자가 저자나 번역자에게 주는 상처는 결코 이해받지 못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별 노고와 시간을 들이지 않고 쓰여진 상업적 저서와 비슷한 가격으로 팔리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은 적도 있지만, 책의 상품화가 갖는 부정적 효과 중 하나는, 피땀어린 각고의 노력으로 쓰여진 책들이 저자의 노고에 값하여 출판사에서 보석처럼 공들여 다듬어지기보다는 단지 교환가치의 담지자로서만 취급받게 됐다는 것, 하나의 빵처럼, 물건처럼 취급을 받게 됐다는 것이리라. 크리스띠앙 장베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망명과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교환가치만을 추구하는 책의 섣부른 상품화를 규제하기 위한 학자들과 출판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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