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9-16 10:37 (월)
[이 책을 주목한다] ‘인종공포와 이주의 기억’ 다룬 『흔적』2호
[이 책을 주목한다] ‘인종공포와 이주의 기억’ 다룬 『흔적』2호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2.02.1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흔적』2호(미건 모리스·브렛 드 베리 편, 문화과학사 刊)
“‘흔적’을 창간한 것은 옛 식민주의와 냉전체제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이론’과 ‘문화’의 유통방식이나, ‘번역’을 상상하고 구조화하는 방식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지난 해 번역의 문제를 다뤄 화제를 모았던 다언어 문화이론 저널 ‘흔적’이 제2호를 간행한 것에 대해, 이번 호 책임편집자인 미건 모리스 홍콩 영남대 교수(문화연구)가 이렇게 운을 땠다. 현재 ‘흔적’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로 발간되고 있다. 향후 독일어, 스페인어, 아랍어, 프랑스어 등으로도 번역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책을 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리스 교수는 “‘흔적’에 기고하는 필자는 그래서 모두 자신이 선택한 언어와 학문의 준거틀을 사용하겠지만, 이 잡지에 글을 쓰는 것은 ‘이질언어적’ 말걸기를 수반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흔적’에 기고하는 것은 다양한 언어들로 읽히게 하려는 의도만은 아니라고 한다. “어떤 공통문화에도 속하지 않고, 개별 ‘공동체들’로 깔끔하게 분할되지도 않는 혼합적 독자들에 의해 읽히기 위함이다. 번역은 여기서 경쟁적 민족-언어적 국가들간의 외교형태가 아닌 이론적 교환의 새로운 국제적 공간을 형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흔적’은 그 실천과정에서 문화이론의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호가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인종공포와 이주의 기억’이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전역에서 일어난 점증하는 이주, 심각한 경제적 문제, 지정학적 격변에 따른 극성스런 인종주의 및 외국인혐오증의 준동”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종족 정체성이 허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유럽 중심의 역사 해체에 필요한 또 다른 도구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는 브렛 드 베리 미국 코넬대 교수(비교문학)의 말은 이번 주제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제1부에서는 ‘이주문제의 윤리학’, 제2부와 제3부에서는 ‘노동의 논리학’과 ‘국가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제4부에서는 ‘강제이주와 국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먼저 이엔 앙 호주 웨스턴시드니대 교수(문화연구)는 기고문 ‘모호성의 함정-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의 피해자 되기와 역사의 잔해’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의 곤경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엔 앙 교수의 관심은 ‘피해자 담론’에 있다. “서구 근대성을 보편적 인간 진보의 마스터 내러티브로 풀어내는 관행이, 많은 종족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역사의/에서의 피해자로 … 학대받은 존재로 내세우도록 부추겨왔다”는 것. 물론 이런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 만들기는 과거의 불이익을 시정해온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런 담론과 서사는 역사의 주체들에게 자신들의 현재 조건에 적합한 과거에 대한 복합적이고 공평한 감각을 부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얀 물리에르 부탕 프랑스 브리타니대 교수(경제학)가 ‘모든 벽들에 대한 증오와 벽 사이에서: 이동성의 소수적 斜線’에서 이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문제삼으며 “이민은 하나의 사선, 자유의 사선”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두 주체성에 대한 일종의 오해,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코마코메 타게시 일본 교토대 교수(교육학)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근대성-중첩된 폭력’에서 “일본과 구미열강에 의한 식민지배에 있어서 각국의 공과를 ‘비교하는’ 수지결산표를 만들 것이 아니라 複數의 제국주의들이 서로 중첩되고 또 갈라지면서 수직으로 폭력을 관철시켜 온 차원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도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오카 마리 일본 오사카여대 교수(아랍문학)가 ‘타자의 언어’에서 밝힌 것처럼 같은 문제의식을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타자의 기억을 분유한다는 것이 “의미를 전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의미 전달을 저해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카 마리 교수는 남한과 북한여성의 이야기하는 방식의 차이를 대표적 사례로 든다. “남쪽과 북쪽의 진술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차이. … 그것은 랑그의 차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공약 가능한 것으로 하려고 남쪽 여성이 북쪽 여성을 향해 가는 것은 겹겹이 금지되어 있다.” 타자의 경험을 분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끈질기게 물으려는 것이다.

‘흔적’ 제3호는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 등의 책임편집 아래 ‘근대성의 충격 1880∼1940년대’를 다룰 예정이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