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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英語’에 미친 나라
[딸깍발이] ‘英語’에 미친 나라
  •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 승인 2008.10.2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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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며칠 전 우리 근대사를 전공하는 한 소장학자가 세미나 때문에 독일을 다녀오더니만,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선 영어가 안 통해요. 영어로 뭘 물으면 들은 체도 안 하고 가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만 보면 서로 영어 한 번 해보려고 설쳐대죠. 너무 미국만 쳐다보고 사는 건 아닌지….”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교수가 말했다. “아니, 이번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된 일본의 마스카와 도시히데 교수는 외국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고, 영어도 잘 못한데요. 그래도 노벨상까지 받잖아요.” 국가는 부도가 날 지경인데도 정부 주도로 온 국민이 영어에다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외화는 바닥나도 영어는 해야 한다니, 망조다. 일본어 강사도 중국어 강사도 영어를 해야 대우 받는다. ‘노숙 인문학자, 부랑 박사’들이 흘러넘쳐 밥을 굶고 있는 데도, 대학마다 외국인 교수 수를 높이기에 안간힘이며,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을 경쟁이나 하듯 미국으로 내몰고 있다. 한마디로 ‘대학의 길은 영어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있고, 미국과 친해지는 데 있으며, 미국화를 계속 유지하는 데 있다’.

미국은 영어장사로 먹고 살겠지만 우리는 뭘로 먹고 살겠나. 농민들의 밥그릇은 늑대 공무원·불량 정치인들이 노린다. 국제화를 빌미로 미녀 행세를 하는 야수 친미정권이 영어 전도사로 국민적 포교를 강행하며 우리 주머니를 더욱 빈곤하게 한다.

 세상이 ‘영어, 영어’하니 나도 부화뇌동해 영어를 좀 배워보겠다고 근년 학생들 틈에 끼어 안간힘을 다 하다가 힘이 딸려서 일단 휴식 중이다. 배워도 늘지 않고, 당장에 영어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된 셈. 세상이 영어로 아프니 나도 아프다.

게다가 중국이 떠오른다고 중국어도 제대로 배워야 하니, 어학하다가 끝장날 판.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잡고 있는 나마저도 이러니, 세상 살기 힘든 사람들은 오죽이나 하겠나. 뱃 속의 아이에게 미국 영주권을 얻어 주려고 만삭의 몸을 이끌고 미국행 비행기를 탄다. 미 국적 비행기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지는 않은지. 이 땅에 태어난 아이는 더 편할 날이 없다.

기저귀를 찬 채 영어 학원으로 보내진다. 영어로 남을 밟고 올라서기 위해 원어민처럼 발음해야 하니, 혓바닥 수술도 서슴지 않는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니 사회에 나가서 늙어 죽을 때까지 ‘영어! 영어!’하며 산다. 환갑이 다 된 어느 주부 왈. 중학교 시절, 한 영어교사가 “미국 가면 거지도 영어를 잘 하는데, 너희들은 거지만도 못하냐”고 꾸지람을 해서 자신이 미국 거지보다 못하다는‘웃기는’ 착각을 했단다.

영어 하나로 국가 경쟁력을 높일 셈이라면 영어마을, 영어아파트, 영어대학, 영어도시, 영어나라를 만들자. 아예, 미국인으로 태어나든가, 미국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국적을 옮기거나, 국가 자체를 미국에 편입시키는 방법도 괜찮을지 모른다.

과연 이렇게 영어능력을 향상 시키면 국가 경쟁력도 높아질까. 꼭 그렇지는 않다. 영어는 필요조건이다. 한문도, 러시아어도, 독일어도, 프랑스어도, 아프리카어도, 남미어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해져야 한다. 원효는 산스크리트어를 못해도, 퇴계는 중국어를 못해도 세계적인 석학이 됐다. 각자의 처지에서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하면 된다. 우물 안 개구리도 그 나름의 삶이 있고, 세계를 가질 수 있다. 우물 밖에서 너른 세상을 본 개구리만 위대한 것은 아니다. 우물 밖에서 못 본 것을 우물 안에서는 더 잘 볼 수도 있다.

물론 영어를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영어를 해야 할 사람은 머리를 싸매고 해야 한다. 사회도 이들을 잘 도와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어를 못해도 노벨상도 타고 훌륭한 경제인도, 예술가나 사상가도 될 수 있다는 격려를 잊어선 안 된다. 영어에 몰입된 현 정부는 제발 정신을 차렸으면 한다.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전전했던 이완용도‘국가를 위해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그렇듯, 지금의 영어입국·친미도 생존과 국가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일 것이다. ‘밥만 주면 아무나 주인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정치인과 개의 공통점 중 한 가지. ‘밥’을 해결해 준다고 미국에만 목맬 필요는 없다. 진정 국가를 위한다면,‘영어에 미친 나라’를 여유롭고 다양한 풍경으로 이끌 ‘균형감’있는 철학이 우선돼야 한다.

최재목 편집기획위원 / 영남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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