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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헤겔, 누가 더 우월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들뢰즈와 헤겔, 누가 더 우월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 신지영 한국외대 강사·철학
  • 승인 2008.10.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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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교수신문> 496호 홍준기 교수의 비판을 읽고

들뢰즈가 공공연히 반헤겔주의를 이야기하고, 현대 철학의 임무는 플라토니즘의 전복이라는 니체의 선언을 되풀이하며, 또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소쉬르를 머리 셋 달린 한 명의 억압자라 말하면서, 이들을 공격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공격당한 진영에서는 들뢰즈의 부당성과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형국인데, 필자는 들뢰즈 연구자로서 들뢰즈의 공격을 되풀이하는 일은 이제 불필요하고, 그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하겠다.


홍 교수는 ‘부정과 모순을 사유하는 영역이 무조건 보수적이라는 공격은 맞지 않다.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는 이미 헤겔이 선취했고, 라깡 역시 정신 분석의 끝, 오이디푸스 너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로부터 가장 먼 개념적 동일성(또는 개념적 차이)을 정초한 아리스토텔레스도 있고, 들뢰즈가 기계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써가면서 논박한 기계론적 합리주의자인 데카르트도 있는데, 들뢰즈는 특히나 플라톤과 헤겔을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판받는 플라톤과 헤겔의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이데아가 원래 구체적이라는 점을, 그리고 헤겔의 존재론적 원천 역시 들뢰즈가 주장하고 있는 그 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에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즉, 들뢰즈가 플라톤과 헤겔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들뢰즈에게 동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일성과 타협하고 기껏해야 가짜 차이, 가짜 운동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헤겔과 여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들뢰즈가 플라톤이나 헤겔을 진지하게 읽지 않았거나 오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들뢰즈가, 플라톤의 후기 대화에서 이데아가 어느 정도 다수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때를 고려한다면, 그때에는 차이 그 자체와 플라톤의 이데아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한 것처럼, 만약 헤겔이 부정과 모순이 아닌 다른 길로 나아갔더라면 자기가 말하고자하는 것이 헤겔의 것과 같은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실체(실사)적 이데아를 놓음으로써 전체를 주어진 것으로 상정했고, 헤겔은 (모순적) 자아를 놓음으로써 전체를 주어진 것으로 상정했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존재는 (개체적-명사적 실체라기보다는 사건으로서) 열려 있는 것이면서 관계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데아를 사유할 때 무엇을 물을 것이 아니라, 누가, 얼마나, 어떻게, 어디에서, 언제로 묻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제언을 한 것이며, 모순으로서의 자아를 놓고 변증법을 통해 전체로 나아가려는 헤겔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이다. 목적이나 기원은 나중 문제고, 주어질 수 없는 사건 전체로서의 존재를 실체적으로-주어진 것으로 간주한 지점에서, 이미 문제는 틀어진 것이다. 라깡이 분석의 끝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시니피앙으로 이루어지는 분석을 통해 시니피앙 너머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일 것인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전체-되기(운동)를 말하는데 헤겔·라깡은 전체라는 미래로 가기(가짜 운동)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혁명적으로-되기가 아닌 언제나 오지 않을 혁명의 미래 말이다.

한편 홍 교수는 ‘헤겔을 잘못 읽었다는 비판에 뒤이은 들뢰즈에 대한 반박은 헤겔 철학이 들뢰즈 철학보다 우월하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이를테면 ‘부정과 모순이 없이는 규정도 조직화도 없을 거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차이 그 자체의 영역에서 부정이나 모순을 대체하는 개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차이가 아니라 거리이다. 거리와 간격이 존재하는 이 영역에는, 들뢰즈가 말하듯 조금도 미규정적이지 않은 부정 관사나 부정 대명사, 미분화된 것은 아니지만 과정을 나타내는 부정법 동사,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우글거린다(디알로그 146). 들뢰즈의 차이가 부정을 내포하지 않기때문에 규정도 조직도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그러므로 오해다.

또한 두 번째로는 차이의 사회학적인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이를 그저 다름으로만 바라본다면 사회적 강자와 약자의 대립 혹은 모순 관계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 경우에 들뢰즈가 그저 다름(외국인 노동자와 다른 노동자와의 차이)으로 문제를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시 들뢰즈 연구자로서 그렇게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들뢰즈에 대한 지나친 오해이다. 아마도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를 실체적 개체들을 구성요소로 하는 집합으로서의 전체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위의 다름은 들뢰즈가 그렇게도 강조한 파생적 차이를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러한 맥락이 여성주의에도 적용되는데, 여성이 남성의 그림자가 아니라 여성 그 자체의 여성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여성주의라면 이 역시 들뢰즈의 차이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차이 역시 파생적 차이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라면 이 문제를 모순으로 푸는 대신, 배치와 홈패인 공간, 힘의 강도, 약함과 강함 등으로 풀 것이다. 들뢰즈가 사회적 강자 집단과 사회적 약자 집단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힘, 힘의 강약, 자본이라는 흐름, 포획, 배치와 같은 것들이다. 사회적 약자 집단이 사회적 강자 집단을 부정하면 대립이 해소되는가. 들뢰즈는 대립과 부정으로 문제가 풀리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표면적 대립의 이유와 의미를 밝히고 거기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디서 발생한 문제인가. 연구자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들뢰즈와 헤겔의 갈등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차이가 헤겔에 의해 선취됐다고 말한다고 해도, 헤겔이 정신-주체-자아의 개념화를 말하면서부터 둘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으며, 헤겔과 들뢰즈, 혹은 그 연구자들 서로간의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이들 사이의 차이는 내가 볼 때는 미시와 거시의 차이이다. 마치 뉴턴 역학과 양자론이 각기 달라 보이는 입장을 취하면서 같은 우주의 다른 면-미시와 거시-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보는 우주는 식별이 일어나기 직전(논리적 이전)의 사건적, 비실체적 우주이고, 헤겔이 보는 우주는 식별이 일어난 후의 (인간이 관찰하는) 실체적 우주일 것이다. 과학자들이 평행우주나 초끈이론으로 뉴턴의 거시적 역학과 양자의 미시적 역학을 대통합하는 이론을 마련할 필요성을 느끼듯이, 들뢰즈 연구자로서 나는 미시-차이의 철학과 거시-동일성의 철학을 통합하는 대통합이론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양자적 효과가 미미하며 뉴턴 역학으로 모두 설명된다고 해서, 미시적인 차원의 양자가 사라지거나 없는 것은 아니다. 거시적인 실체 차원에서 관찰되는 인간과 이성과 역사가 모순에 의해 설명된다고 해서, 그로부터 벗어나거나 설명되지 않는 미시적인 차원이 없거나 무시돼도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거기에 삶이, 생명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준거점이 없으면 어떠한 프로그램도 정체도 불가능하므로 준거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시차원의 분석이 요구될 수 있다. 들뢰즈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성 일반, 외국인 일반은 추상이지만, 그들을 있다고 두고 만들어진 것들(법, 제도, 행정, 관습, 성 차별적 노동법, 이미 폐지된 호적법, 외국인 노동자 차별이 허용되는 법 등)이 있으므로,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준거점을 설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준거점을 설정하자마자 그 이후로는 이 준거점이 과연 전체를 설명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할 것이다. 노동으로서의 자아는 전체일까, 여성으로서의 자아는 전체일까, 노동을 말할 때 배제되는 것은 없는가, 여성을 말할 때 배제되는 것은 없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그것이 헤겔과 들뢰즈를 통합하는 이론을 사유하게 되는 문제 설정적 질문이 아닐까.

신지영 한국외대 강사·철학

필자는 프랑스 리옹 3대학에서 들뢰즈로 박사학위를 했다. 주요저서로 『들뢰즈로 말할 수 있는 7가지 문제들』 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들뢰즈-니체 접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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