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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황과 쟁점]디지털 치매, 기술자율주의와 테크노포비즘의 시선
[현황과 쟁점]디지털 치매, 기술자율주의와 테크노포비즘의 시선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10.28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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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보캅」을 기억할 것이다. 과연 우리도 두뇌 일부를 제외한 신체 거의 모든 부위를 기계로 대체한 로보캅과 같은 존재로 진화할까. 기계인간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다는 징후가 디지털 치매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보이고 있다.

핸드폰, PDA, 컴퓨터, 네비게이션 등이 어느 날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지인들의 연락처나 스케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간단한 수식 계산이나 길 찾기에도 서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디지털 치매로 지칭되는 이 현상을 두고 그간 언론에서는 단지 일시적인 기억력·계산력 감퇴와 같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지적해왔다. 그러나 기술 사회에서 인간의 미래를 가늠할 중요한 징후라고 보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우선 몇몇 기술철학자들과 기술자율주의를 신뢰하는 학자들은 디지털 치매 현상이라는 말 자체가 근거 없는 테크노포비즘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인간이 기술에 의존하는 과정에서 일정부분 능력들이 감퇴돼 온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보다 창조적으로 능력을 발휘할 여지를 만들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기술 의존 심화 현상은 인간 진화의 자연스런 양상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선 이들은 기술로 인한 인간 능력의 부분적 약화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현상이며, 그 과정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능력을 발전시켜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손을 이용한 도구의 사용이나 문자나 인쇄술의 발명은 각각 손의 능력이나 기억력을 감소시킨 측면이 있다. 그러나 손이 도구를 사용하면서 입을 통한 언어 구사 능력이 향상된 측면이라든지, 기억의 압박에서 해방돼 새로운 지식 생산을 촉진시킨 점은 분명 인간 진화의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들은 특히 현대의 정보과학을 중심으로 한 휴먼인터페이스의 발전은 방대한 정보의 처리와 효율적 업무 처리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휴먼인터페이스를 비롯해 기술을 더욱 진보시켜 인간의 진화와 문명의 전진에 기여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닉 보스트롬, 나타샤 비타모아 등은 인간 진화의 새로운 국면을 전망했다.

한편 기술의 자율성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학자들과 전통 인문학의 관점을 지닌 학자들은 디지털 치매 현상을 암울한 기술 디스토피아의 징후로 판단한다. 이들은 기술 의존의 심화 속에서 인간이 기억력과 계산력, 기본적인 운동 능력 등을 상실하게 된다면, 어떤 창조적이고 진일보한 능력들의 발휘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식 창조력과 방대한 기술에 대한 통제력은 기초적인 지적 능력과 신체 능력이 토대로 깔릴 때 발휘가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휴먼인터페이스를 통해 인간의 창의력이 얼마나 진전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다. 즉 기억력이나 계산력의 감소에 비례해서 창조성이나 보다 종합적인 기술 통제·관리 능력이 발달할 것이라고 여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삶의 풍요로움은 기술적 효율성만으로 담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또 과도한 기술 의존은 몇몇 SF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이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反인간적인 기술 문명을 낳는 귀결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지적된다. 현상학 및 실존주의 계열의 철학자들과 사회구성주의적 입장의 사회학자들이 주로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디지털 치매 현상은 기술 사회에서 인간 존재 양식의 변화를 전망하게 해주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는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향후 정신의학, 철학, 사회학, 인간공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가 요구된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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