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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생명의 향기
[학이사] 생명의 향기
  • 황성빈 세종대
  • 승인 2002.0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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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9 10:26:46
황성빈 / 세종대·분자생물학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고등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의 지놈이 완전히 읽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분홍빛 청사진이 제시되고 있다. 즉 인체(생명)의 비밀이 조만간 완전히 밝혀짐으로써 질병과 노화 문제의 해결을 통한 수명 연장의 꿈이 달성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잇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비밀은 정복될 수 있는가. 지놈의 염기서열을 읽은 결과 인체의 경우 최대로 약 4만개의 유전자가 존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곧 최소한 4만종의 단백질이 존재하며 따라서 4만종 이상의 생명현상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유기적이기 때문에 4만여종의 생명현상은 직·간접적으로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최대 4만40000종의 생명현상이 존재할 것이다. 생명의 비밀을 최소한으로 밝히려해도 4만40000가지의 현상을 ‘실험적으로’ 규명해야 한다. 혹자는 컴퓨터를 이용한 사이버실험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할 지 모른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가상세계가 아닌 3차원의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다. 컴퓨터 혹은 이론생물학이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데 기여는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생명체내에서 증명해야만 하는 현상들이다.

여기까지는 4만 종류의 단백질이 존재하는 가정을 바탕으로 계산한 것이지만, 실제 세포내엔 50만∼100만여종의 단백질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한 탄수화물, 핵산 등의 다른 물질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세포→조직→기관→기관계→개체로 이어지는 상관함수를 추가하면 생명현상의 가지수는 ‘무한대’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의 3차원적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현상 등의 ‘영적현상’을 추가하면, 인간의 능력은 생명의 비밀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다.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4∼10개의 유전자로 구성된 간염바이러스도 못잡고 있지 않는가. 생명의 비밀은 정복하려는 자가 아니라 경외하는 자에게 ‘향기’가 되어 다가가는 것 같다.

인간은 왜 인체(생명)의 비밀을 정복하려 하는가. 자연과학적 호기심, 지적 갈구 등 여러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겠지만 결국 인간 자신을 위해서이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수명연장 더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질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꺼져가는 생명을 보면 가슴이 찢어진다. 60∼80세의 자기수명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질병은 정복돼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생명과학의 전분야에서 경주하는 노력들은 너무나 타당하다. 문제는 살만큼 살았어도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있다. 어쩌면 이는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선을 자기 하나에 멈추지 말고 지구 전체로 옮겨보자. 현재까지 밝혀진 150만여종의 생명체 중 인간이라는 한 종은 생체량이 가장 크며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해 살고 있다. 따라서 생태계를 파괴해 가는 속도는 가히 초기하급수적이다. 지구의 나이로 볼 때 ‘눈깜짝할 사이’에 출현한 인간으로 인해 전체 종의 20%가 지구상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멸종위기에 있으며, 매년 50만㎢의 열대우림 지역이 사라지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증가된다면 지구의 파괴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지구의 종말’은 나 때에는 안일어나겠지만 내 후손 어느때엔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나만 오래 살면 그만인 것인가.

지구상에는 자기집단의 수가 증가하면 자살하여 전체를 보전하는 생명체도 있고, 일생동안 오직 한번 교배해 자손을 생성한 후 자식의 먹이가 되어 사라지는 생명체도 있다. 분명 이들은 인간보다 하등해 보이지만 수명연장의 욕심에 시달리는 인간보다 아름답다. 모든 생명체는 자식에게서 삶의 의미,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육체는 사라질지언정 유전자는 자식을 통해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연속성’, ‘물질의 순환’이라는 형태로 인간은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았는데, 무슨 영화나 의미를 더 찾겠다고 하루라도 더 살려고 아둥바둥하는 것인가. 노화와 죽음은 3차원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한계이자 새로운 생명을 위한 비밀이다. 인위적으로 조절하려 할 때 생명의 향기는 사라진다. 진정 영원한 생명을 꿈꾼다면 이 제한된 3차원 세계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명의 향기는 생명의 비밀을 음미하려는 자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 우리는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생명공학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생명의 비밀을 완전히 이해했음도 이해할 수 있음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명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어야 한다. 생로병사는 생명의 비밀이기에 향기로 잔잔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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