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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읽기] 타자와 윤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비교읽기] 타자와 윤리의 자리는 어디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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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17:43:18
『윤리21』(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刊), 『윤리학』(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동문선 刊)

강신주 / 연세대 강사·철학

돌아보면 20세기말은 해체의 시대로 기억될만한 시기였다. 해체주의적 기획은 범주적으로 동일성(identity)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차이(difference)가 억압되고 은폐돼야만 한다는 것을 폭로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차이가 우선적인 것이고, 동일성은 이런 차이를 억압하고 나서야 현상하는 파생적인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기원이나 근거도 아니면서 그 자리를 찬탈했다는 점에서, 동일성은 지배의 의지에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동일성의 해체는 그것의 파생성과 지배의 의지에 대한 폭로에 다름 아니다.

책임과 주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사정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차이라는 원초적 관계에 내던져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해체를 통해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타자를 발견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일성이 미리 설정된 관계의 논리로 작동했다면, 차이는 미리 설정된 관계가 없이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만들도록 강제한다. 이제 차이에 내던져진 우리는 어떤 전망과 약속도 없는 타자와 목숨을 건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해체의 끝에서 우리는 타자, 더 정확히 말해서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의 관계를 발견하게 됐다. 이런 지점에 최근에 동시에 번역된 바디우(A. Badiou)의 ‘윤리학’과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윤리21’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두 책은 모두 해체적 기획을 인내를 가지고 따라온 사람에게만 온전하게 읽힐 수 있다. 고진에게 있어 타자는 자신에게 책임(responsibility)를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는 타자의 예로 죽은 자를 들고 있다. 그는 죽은 자와 우리의 관계가 비대칭적 관계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죽은 자와 교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변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변하겠는가? 단지 그로써 산 자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뿐이고,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있어 타자는 책임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주체를 변화시키게끔 만드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고진은 자신의 책임에 대한 논의가 단순히 자극-반응이라는 인과적 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의 칸트 독해는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책임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어떤 사태가 마치 자신을 원인자로 해서 일어난 것처럼 우리가 떠맡는 데서 온다. 따라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입법자, 자기 원인자로 정립하는 활동 속에서만 존립되는 것이다. 결국 고진에게 있어 자유는 책임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칸트가 말하는 의무는 ‘자유로워 지라’는 의무이다. 거듭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적·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말과 같다. 자유를 의지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난다. 그 이외에 자유는 생기지 않는다.”

이 점에서 바디우의 논의는 고진의 논의를 넘어서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비대칭적 차이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타자를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 치밀하게 사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주체를 구성하도록 소환하는 것은 잉여의 것이라는 점, 또는 상황에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 상황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상적 행동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것을 사랑의 예로 설명한다. “사랑의 만남의 영향 아래 내가 그 만남에 실질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내 상황에 ‘거주하는’ 나 자신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윤리학’의 핵심 개념인 ‘충실성(fidelity)’이 고진의 ‘책임’ 개념과 동일한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디우는 이런 사건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실재적 과정을 ‘진리’라고 규정한다. 책임을 떠맡아야, 다시 말해 자신을 자기원인자로 받아들여야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고 고진은 지적했다. 이와 유사하게 바디우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충실성의 지지자, 즉 진리 과정의 지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사건이 생기기 ‘이전의’ 상황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한다. 우리는 진리 과정이 주체를 도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의 비대칭적 관계를 떠나서 윤리라는 관계의 문제를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 동일성의 논리에 따르면 관계란 미리 정해진 규칙이지만, 차이의 논리에 따르면 관계란 활동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비대칭적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자 결단이자, 타자로의 초월이다. 이 점에 대해 고진과 바디우는 의견을 같이 한다.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그들의 사유는 상당히 이질적인 길을 걷고 있다.

고진이 칸트(I. Kant)에 대한 독해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키는 반면, 바디우는 괴델(K. G쉊el)과 코헨(P. Cohen)의 집합론 혹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독해로부터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런 논의 기점의 차이는 생각 이상으로 양자의 사유 체계에 무의식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디우와는 달리 칸트를 따름으로써 고진은 타자의 강제성,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태도 변경, 사유, 반성 등을 강제하는 비대칭적 차이의 관계를 일관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의 관점에서 보아야 우리는 윤리적 책임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는 그의 주장은 주체의 자발성에 근거한 논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타자의 강제성이 빠져 있다. 결국 고진의 이런 자유와 책임론을 통해서 발견된 타자가 진정한 타자일 수는 없고, 단지 반성으로 정립된 타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 주체는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의 관계하에서 스스로를 주체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바디우의 손을 드는 이유

앞에서 우리는 ‘타자와 목숨을 건 관계’라고 말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타자에 대한 배려’ 혹은 ‘타자와의 공존’이라는 논리와 질적으로 다른 관계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고진의 지적처럼 대칭적 차이와 비대칭적 차이는 완전히 다른 논의이다. 나와는 다른 너는 엄격한 의미에서 타자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서의 타자는 나에 대한 부정적 규정으로서의 너이고, 따라서 나에 대한 규정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타자는 무엇보다도 환원불가능한 단독성(singularity)을 통해, 바디우의 지적처럼 타자와의 만남이란 사건을 통해, 우리의 삶의 차원에서 관계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자, 우리로 하여금 계속 반성하고 사유하도록 만드는 강제력을 갖고 있는 무엇이다. 결국 타자는 고진의 이야기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의 자발적 태도 변경을 통해 들어오게 되는 것만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고진보다 바디우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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